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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숙 기자<johanal@joongang.co.kr>
5대째 화가 배출한 한국최고의 예맥(藝脈) |
“진도의 양천 허씨들은 빗자락 몽둥이만 들어도 명필이 나온다”는 유행어의 근원지인 운림산방. 내리 5대째 유명화가를 배출한 이 산방의 비밀은 과연 무엇일까? | ||
조용헌 <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 ||
![]() 당대발복(當代發福)에 끝나지 않고 그 발복의 가업을 대를 이어 나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조부대에 하던 일을 손자대에서까지 계속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한국의 근세 100년처럼 자신들의 전통과 민속이 총체적으로 단절되고 해체되는 과정을 겪어야 했던 나라에서 선대에 하던 일을 손자대가 계승하는 경우는 희귀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그 희귀한 사례가 이번에 찾아가는 운림산방(雲林山房)이다. 전남 진도에 자리잡은 운림산방을 중심으로 하여 5대째 내리 화가를 배출한 집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진도에 사는 양천 허씨(陽川 許氏) 집안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아마 5대째 계속해서 예술가를 배출하는 집안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도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1대는 소치 허련(小痴 許鍊:1808∼1893), 2대는 미산 허형(米山 許瀅:1861∼1938), 3대는 남농 허건(南農 許楗:1908∼1987)과 그 동생인 임인 허림(林人 許林:1917∼1942), 4대는 임인의 아들인 임전 허문(林田 許文:1941∼현재), 5대는 남농의 손자인 허진(許塡:1962∼현재)으로 이어지고 있다. 허진 이외에도 같은 5대 항렬로는 허재, 허청규, 허은이 화가의 길을 가고 있다. 그런가 하면 무등산 춘설헌(春雪軒)의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1891∼1977)도 진도에서 태어난 양천 허씨로 같은 집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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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in Lippenstift, dazu ein Buch über Cäsar: "Persönliche Dinge für ein 'Notfallköfferchen' auszuwählen, berührt die Frage, was einem am wichtigsten ist", sagt die koreanische Konzeptkünstlerin Chang-Jin Lee. "Was die Leute für wichtig halten, unterscheidet sich je nach ethnischem, sozialen und wirtschaftlichen Hintergrund." Die Kunstprojekte der Ausstellung "Homeland Security Garden" sind derzeit im Wintergarten des World Financial Center in New York zu seh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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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들에게 안위를 느끼게하는 물건들
여행용 칫솔과 치약,약간의 현금과 깨끗한 속옷,셰익스피어의 작품과 밝은 분홍색 립스틱 등등. 이것들은 미국민들이 일상생활에서 안위와 그에따른 마음의 평화를 느끼는 수많은 물건들의 하나다. 한국 출신의 재미 아티스트 이창진씨가 붕괴된 뉴욕 세계무역센터 맞은 편의 세계금융센터 윈터가든에서 열고있는 전시회에서는 미국민들이 안위를 느끼는 수많은소소한 물건들이 보물처럼 케이크 상자 크기의 유리상자들 안에 진열돼있다.
군것질 거리인 팝 타츠와 코카콜라 한병,피임약,두동강난 보드카 병도 전시돼있다.휴대폰이 있는가 하면 사진이 들어있는 유리 상자도 있고 지난 80년대의 인기 TV쇼 '골든 걸즈'의 주인공 그림들로 장식된 상자도 있다.
정원처럼 꾸며진 전시장 안에 미로처럼 늘어선,인조 잔디로 마감한 진열대 위의200개의 유리상자 속에 든 이 물건들은 인종적 배경도 다양한 200명의 미국인들이각기 보내준 것이다.
이창진씨는 올들어 뉴욕에서 개최한 아트 워크숍 참가자에게 개인적으로 안위를느끼는 물건들을 건네달라고 부탁해 이 물건들을 모은 후 '안전 상자'라는 이들 설치 작품을 구상하게됐다.
진열대가 미로처럼 늘어선 것도 현대인들에게 위로를 주는 물건들이 매우 복합적임을 상징한다.
"이 작업은 희망과 전진,우리가 아끼는 것을 알아보고 가치있게 생각하는 것들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라고 이씨는 말했다.
"안전 상자에 넣을 개인 소지품을 선택하는 일들은 우리가 무엇을 소중하게 생각하는지를 되새겨보게 한다"는 설명이다.
세계금융센터의 예술.전시책임자인 데브러 사이먼은 "재미있는 물건들도 있고묘한 것들도 있는 등 물건들이 다양한 층에서 작용을 하고있다"고 평하고 "사람들이(이 전시회를 보고) 삶에서 안위를 느끼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될 것"이라고 말했다. '홈랜드 시큐리티 가든'이라는 제목의 이 설치미술 전시회는 22일 개막해 9월15일까지 계속된다. <연합>
2005.08.24 (수) 10:49
http://www.sgt.co.kr/Service5/ShellView.asp?TreeID=1052&PCode=0004&DataID=200508241013001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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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blog.naver.com/mass016/20014072149[鳥나단님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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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친구들에게 어떤 그림들을 보여주었더니, 친구들이 그것들을 두고 기적이라고 극찬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작품들에 대해서 설명할 기회가 차후에 마련된다면 그 참에 설명하겠습니다.” (알베르티의 회화론 우리말 번역 43쪽)
알베르티는 「회화론」 제 1권에서 ‘기적의 그림’에 대해서 언급한다. 르네상스 이전 회화의 역사에서 기적 그림은 두 가지가 있다. 기적이 예술가를 도와서 완성하는 그림과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주술 그림이 그것이다. 그러나 알베르티의 기적은 화가가 스스로 완성한 공간적 회화라는 점에서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았다. 화가의 붓을 이끈 것은 마리아나 예수의 손이 아니라 수학과 기하학이었다. 그가 완성한 그림은 역병을 씻어 내거나 풍랑을 잠재우는 대신 평면 위에다 공간적 환영을 완전하게 펼쳐 보이는 ‘시각의 기적’을 선보였을 뿐이다.
그의 손으로 그렸을 그림 가운데 한 점이라도 남아서 전해졌더라면, 아니 어떤 그림들이었는지 책에다 몇 줄 설명을 붙여두었더라면 르네상스 원근법의 탄생에 관한 역사가 새롭게 씌어졌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친구들이 보고 ‘기적’이라고 극찬했던 그림들이 분명히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그림의 크기나 주제, 소재와 대상에 관한 아무런 단서도 남아 있지 않다. 그렇다면 인문주의자들이 보았던 ‘기적의 그림’은 앞선 시대의 그림과 무엇이 어떻게 달랐을까?
알베르티 시대의 이탈리아와 북구 화가들은 나름대로 회화적 공간을 생산하는 비법을 가지고 있었다. 오랜 공방전통으로 전수된 이른바 ‘눈어림 원근법’은 눈으로 어림잡아서 그림 안 공간으로 시선을 밟아 들어가는 환영을 생산한다. 조토가 프레스코에서 건축물의 바닥이나 천장을 처리할 때 그림 바닥면과 평행을 이루는 수평선들을 마치 계단처럼 쌓아올리는 방식으로 원근을 드러낸 것이 눈어림 원근법의 첫 시도로 꼽힌다. (그림 2)
조토의 원근법은 건축물의 바닥이나 천장이 규칙적인 마름모꼴을 취하기 때문에 공간감을 어설프게 암시하기는 하지만, 횡선들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아직 공간의 물리적 체계를 갖추지 못했다. 더군다나 등장인물과 공간의 관계는 상징적-의미론적 차원에 머물렀다.
14세기 초 로렌체티 형제들에 이르러 눈어림 원근법의 횡선처리는 보다 탄력적인 입장을 보인다. 그림 원경으로 갈수록 바닥면의 횡선 간격이 좁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알베르티는 화가들의 관례적 실행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들은 정사각형의 밑변과 등거리 관계에 있는 횡선을 사각형 안에 수평으로 긋습니다. 밑변과 새로 그린 횡선 사이의 간격을 3등분한 다음. 그 가운데 한 칸을 버리고 두 칸에 해당하는 거리를 측정합니다. 처음 그렸던 횡선의 위쪽에다 다시 이것과 등거리 관계에 있는 횡선을 그리는데, 그 높이를 조금 전 단계에서 세 칸 가운데 두 칸에 해당하는 거리에 맞추어 둡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씩 올려 그릴 때마다 앞 단계에 그린 횡선 높이의 2/3에 해당하는 간격만큼씩 진행해 나갑니다. 수학자들이 하는 말대로 표현하자면, 어떤 횡선이라도 그것이 잘라내는 면적에다 다시 반을 더해야 앞 단계 횡선이 잘라내는 면적과 같아지는 셈입니다.”
(그림 3)에서 a, b, c, d...는 바닥면을 수평으로 구획하는 횡선들이다. a-b가 그리는 간격의 2/3가 b-c, 그리고 b-c의 2/3가 c-d가 된다. 거꾸로 말하면 c-d의 한 배 반이 b-c, 그리고 b-c의 한 배 반이 a-b가 된다. a-b의 거리를 기준치수 A로 삼고 각 횡선의 간격을 그린다면 b-c의 거리는 2/3A, c-d의 거리는 2/3A-1/3(2/3A)=4/9A, d-e의 거리는 4/9A-1/3(4/9A)=8/27A가 되어야 한다.
눈어림 원근법은 눈금자 하나를 가지고 간편하게 작업을 실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알베르티가 제안하는 수학적 원근법과 비교해서 두 가지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작업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시각피라미드의 정점에 대응하는 화면 위의 소실점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그림 바닥면과 수평을 이루는 첫 번째 횡선 b의 높낮이를 눈대중으로만 가늠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시선거리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시선거리는 화가의 작업시점과 화면을 수직으로 잇는 최단거리로서, 붓을 들 때마다 동일한 시선거리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정확한 공간을 생산하기가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그림이 완성되면 보는 이는 화가가 작업을 진행하면서 정해둔 시선거리만큼 거리를 두고 화가의 작업시점을 찾아서 그림을 읽어야 하므로 눈어림 원근법을 가지고는 화면 위에 재현된 공간을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없다. 알베르티는 횡선을 그리는 대신 시점을 먼저 정하는 방식을 제안한다. 이로써 두 가지 문제가 해소된다.
“우선 조그마한 백지를 마련해서 그 위에 수평으로 직선을 하나 그은 다음, 직선 위에 화면에다 그려놓은 정사각형의 밑변에서 했던 만큼 똑같은 수의 분할점을 표시합니다. 백지에 그은 직선 위쪽에 화면에다 그려놓은 정사각형의 중심점과 같은 높이에 한 점을 정합니다. 이 점으로부터 조금전 정사각형에서 그랬던 대로 각각의 분할점까지 곧장 선으로 연결합니다. 그 다음 직선의 오른쪽 끝에 있는 마지막 분할점을 눈에서 화면까지의 거리, 곧 시선거리만큼 연장합니다. 그리고 화면의 위치에 해당하는 그 지점에 수학자들이 사용하는 개념 가운데 이른바 수직선을 그어서 직선과 교차시킵니다. 여기서 수직선이란 다른 직선과 만났을 때 이쪽저쪽 모두 직각으로 교차하는 선을 일컫습니다. 이처럼 수직으로 교차시킨 선 위에는 수직선 오른쪽에 위치한 화가의 시점과 수직선 왼쪽 바닥에 위치한 다수의 분할점을 연결했을 때 수직선을 지나는 시선의 통과점들이 차례로 기록됩니다. 수직선 위에 표시된 통과점들을 제각기 수직선의 왼쪽 방향으로 수평 연장하면 이 연장선들은 마침내 바닥의 직선과 평행한 횡선들을 그리는데, 이로써 정방형으로 구획된 바닥장식들이 시각피라미드의 법칙에 걸맞게 완성됩니다. 바닥장식의 횡선들이 제대로 그려졌는지 확인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바닥장식의 정방형에 대각선을 그려서 두 개의 삼각형으로 잘랐을 때, 어깨 위에 붙어 있는 다른 정방형도 똑같이 잘린다면 횡선이 제대로 그어진 것입니다.(그림 4)
횡선을 아래서부터 차례대로 그려나가는 눈어림 원근법이 그림 위에 직접 눈금자를 대고 실행하는 방식이라면, 알베르티의 수학적 원근법은 횡선을 제일 마지막 단계에 그린다. 먼저 화면에 시각 피라미드의 정점에 대응하는 중심점을 결정하고, 중심점을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수평 연장해서 화면 바깥의 시점을 정한다. 이때 화면을 90도 돌려세운 수직선에서 시점까지의 거리가 시선거리가 된다. 그 다음 시점으로부터 화면 바닥에 칸칸이 쪼개어둔 종선의 출발점까지 시선가닥을 부챗살처럼 뿌린다. 이때 시선가닥이 화면의 측면 수직선을 지나는 통과점을 일일이 표시한다. 그 다음에 통과점들을 다시 수평 연장하면 비로소 그림 속의 바닥장식들을 수평으로 구획하는 횡선들이 확보된다.
눈어림 원근법에서 횡선 사이의 간격 비례, 곧 a-b : b-c의 관계가 3:2에 해당한다. 그러나 알베르티의 수학적 원근법에서는 a-b의 거리를 A, b-c를 B, c-d를 C라고 했을 때 다음과 같은 값이 나온다.
알베르티의 수학적 원근법은 소실점에 해당하는 중심점과 시선거리를 먼저 정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횡선을 구한다. 수학적 원근법은 어디까지나 회화적 공간을 생산하려는 화가들의 지침이다. 그러나 알베르티의 방식을 뒤집어 응용하면 완성된 그림으로부터 화가가 작업과정에서 그림 바깥의 한 지점에다 정해둔 시점의 위치, 곧 시선거리를 계산할 수 있다. 단, 한 가지 전제가 붙는다. 그림 속의 바닥 장식이나 천장의 구획 또는 그림 측면의 창문 따위가 가로 세로가 정확히 일치하는 정방형이거나 정방형을 유추할 수 있는 형태 - 예컨대 원형이나 다면체 -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림 5)에서 e와 v가 만나는 점을 k로 표시하고, d와 k를 잇는 사선을 그어서 A를 지나는 중심선과 만날 때까지 연장한다. 중심선과 사선이 만나는 점을 B로 표시한다. 또 B에서 수직선을 떨구어 화면 바닥선과 만나는 지점을 D로 표시한다. 여기서 작은 삼각형 d-k-e와 큰 삼각형 d-B-D는 하나의 꼭지각을 공유한 닮은꼴의 직각 삼각형이 된다.
(그림 6)에서도 마찬가지다. 작은 삼각형 l-v-m과 큰 삼각형 l-B-s가 닮은꼴이다. 그림 5와 6에서 시점의 높이, 곧 A-e와 C-m과 B-s는 모두 일치한다. 그러므로 두 개의 큰 삼각형은 높이가 같다. 또, 앞서 언급한 전제대로 바닥장식이 정방형이라면 그림 5의 d-e와 그림 6의 l-m은 길이가 같다. 그리고 그림 5에서 v는 그림 6에서 시선다발이 수직선을 지나는 통과점 v와 일치하므로 두 개의 작은 삼각형은 크기와 형태가 똑같다. 마찬가지로 두 개의 큰 삼각형도 크기와 형태가 똑같다. 화가가 정해둔 시선거리 C-B는 l-s에서 l-m을 뺀 거리와 같으므로, 그림 5에서 d-D에서 d-e를 뺀 거리와 일치하고, 이것은 A-B와 같다. 정리하면 이렇다. 바닥장식이 정방형일 경우, 정방형의 어깨를 짚는 사선을 그려서 중심선과 닿을 만큼 연장한다. 사선의 연장선과 중심선이 만나는 지점에서 중심점까지의 거리가 곧 시선거리가 된다.
알베르티의 친구들과 후대의 화가들은 그림 바깥에 시점을 던져두고 그림 안의 횡선을 그리는 방식을 잘 알고 있었다. 회화는 건축과 등장인물들이 제멋대로 몰려 있는 집합공간에서 유기적인 체계공간으로 수학적 발걸음을 내딛었다. 화가들은 또 그림 속에 화면의 바닥면이나 측면과 평행을 달리는 정방형이나 원을 그려둠으로써 보는 이에게 시선거리와 시점의 공간적 좌표를 계산할 수 있는 단서를 풀어두기도 했다. 소실점과 중심점은 여럿이 될 수 있으나 시점은 반드시 하나여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예컨대 건물의 벽면이 화면의 바닥면과 평행을 이루지 않을 때 소실점은 둘 또는 그 이상으로 늘어나지만, 시점과 시선거리는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는다. 하나의 그림 안에다 소실점을 여럿 책정하는 경향은 종교 역사화에서 유난히 두드러진다. 시선거리가 ‘무한히’ 늘어나거나 그림이 시각 피라미드 바깥으로 퉁겨나가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화가들의 고심을 들추어보자.
프란체스카는 그림 구성을 세 단계의 층위로 구분한다. 석관의 수평 마감과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의 완곡한 흐름이 지하, 지상, 천상의 영토를 나누었다. 죽음과 삶과 부활의 세 영역이 잘 포개어둔 이부자리처럼 그림의 하단에서 상단까지 겹쳐졌다.(그림 7)
무덤을 지키는 파수꾼들은 군장을 갖추고 창을 든 채 잠들었다. 병사들은 예수의 부활을 보지 못했다. 석관이 지배하는 죽음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투구를 벗고 정면을 향한 두 번째 병사는 화가의 자화상일 가능성이 크다. 이들은 둥글게 둘러앉아서 평면 회화의 공간적 깊이를 생산한다.
예수는 허리를 곧게 펴고 석관을 나선다. 그의 자세는 오른손에 든 승리의 깃발처럼 죽음과 삶과 부활의 신비로운 세 과정을 관통한다. 화가는 수평의 무거운 경계를 극복하는 수직의 역동적 구성으로 부활 예수를 그려냈다.
프란체스카는 동굴형 무덤 대신 석관형 무덤을 골랐다. 대개 벗겨진 석관 뚜껑은 보는 이에게 잘 보이도록 석관 앞이나 옆쪽에 비스듬히 나뒹굴기 마련인데, 여기서는 어쩐 일인지 보이지 않는다. 죽음에서 깨어나 관을 열고 일어난다는 줄거리의 전개보다 미스터리의 실현이라는 신비적 관점이 수용되었다.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가 닫힌 문을 드나드신 것처럼 석관 뚜껑을 건드리지 않고 일어났다는 것이다. 석관이 제단의 형식을 취한 것은 13세기 이래의 전통이다. 석관 위나 주변에 제단 집기나 향로 따위를 흩어놓는 경우도 있지만 여기서는 모두 생략되었다.
프란체스카는 보는 이의 시점을 셋으로 나누었다. 그림의 좌우 가장자리에 경계를 짓는 두 개의 원주를 보면, 원주 밑에 깔린 받침돌의 측면경사가 밑으로 기울었다. 이로써 보는 이의 시점도 그림 바닥면 아래로 낮추어졌다. 석관 앞에서 잠든 병사들도 하부 공간을 지배하는 낮은 소실점에 의해 지배받는다. 첫 번째 시점이다.
이에 비해 승리의 깃발을 오른손에 세워 쥔 예수는 그림 상부 공간을 지배하는 또 다른 소실점에 귀속된다. 두 번째 시점은 석관 높이에 걸쳐 있다. 석관 위에 놓인 예수의 왼쪽 발바닥은 완전한 수평상태를 드러낸다. 왼발의 자세를 시간적 계기로 환원해서 읽는다면, 두 번째 시점의 개요는 죽음을 딛고 일어나는 육신 부활이다. 붉은 색 겉옷의 옷주름이 일제히 왼쪽 다리의 동세를 뒷받침한다.
그의 부활한 육신은 어두운 산 그림자를 배경으로 둘렀다. 물성을 털어내고 중간색으로 처리된 배경을 깔고 예수의 균형 잡힌 인체와 옷 주름이 부조적 실물감을 획득한다. 예수는 오른발에 체중을 싣고 왼발을 접어 올렸으나, 상체의 움직임은 수직 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의 두 다리가 전후의 무게를 맞추고, 두 팔은 좌우의 균형을 잡는다. 목줄기에서 배꼽까지 이어지는 상체의 종선과 오른손에 쥔 깃대의 경사가 서로 기대었다.
예수는 오른손에 깃발을 쥐었다. 프란체스카는 왼손에 승리의 깃발을 쥐고 오른손으로 축복의 손짓을 보이는 전통적 재현에서 비켜섰다. 예수의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은 승리의 기쁨이나 구원의 축복보다는 심판과 경고에 가깝다. 죽은지 사흘이 지났지만 그의 몸에 난 상처에는 붉은 피가 마르지 않았다.
보는 이의 세 번째 시점은 정면을 응시하며 그림 바깥을 쏘아보는 부활 예수의 눈빛과 대응한다. 그의 얼굴은 푸른 하늘빛을 배경으로 삼았다. 그의 시선은 죽음과 삶, 시공의 굴레를 넘었다. 보는 이의 시점에 구애 없이 현재화된 기적을 증언한다. 등장인물들이 구축하는 피라미드 구성과 부활을 목격하는 보는 이의 시각 피라미드가 세 번째 시점에서 만난다. 예수의 좌우 배경에 늘어선 나무들은 수관을 산등성이 위로 내밀었다. 왼쪽 나무들은 잎이 모조리 죽었고, 오른쪽 나무들은 잎이 무성하게 살았다. 원근의 나무들이 그리는 시점의 높이도 산등성이에 걸쳤다. 산등성이는 인성과 신성의 경계이기도 하다.
예수는 죽음과의 힘겨운 싸움에서 누구의 도움 없이 일어섰다. 그림 하단에 지친 육신을 누인 파수꾼들과 상단의 홀로 선 예수의 도상적 대비는 죽음을 딛고 승리하는 부활의 논리에 적합하다. “나에게는 목숨을 바칠 권리도 있고, 다시 얻을 권리도 있다”는 요한 10장의 말씀이 이루어졌다.
그림 8. 보티첼리의 〈수태고지〉
흰 백합을 든 천사가 마리아의 처소를 찾았다. 피에트라 세레나를 깎아서 세운 뒷벽이 수태고지의 행복한 배경이다. 네모꼴의 규칙적인 바닥 격자가 공간적 원근을 암시한다. 북구 도시 풍경이 피렌체 시의 전경을 대신해서 너른 원경을 차지했다. 천사는 날개를 접지 못했다. 왼쪽 발을 내밀고 성급히 무릎을 꿇었지만 왼발의 자세는 다급한 움직임을 지탱하기에 어중간하다.
마리아는 상체를 크게 휘둘러서 몸을 뒤로 젖힌다. 하체와 상체, 상체와 머리에 각각 입체적인 S 형태가 그려진다. 적어도 인체의 움직임에서만은 후기 고딕의 조형 문법을 벗어나지 못했다. 손바닥을 노출한 채 두 팔을 앞으로 뻗은 마리아의 자세는 거부 또는 부정의 의미로 읽힐 수 있지만, 보티첼리는 여기에 다른 뜻을 담았다. 화가는 앞서 그린 <프리마베라>의 한복판에 등장하는 베누스의 자세와 손짓에서도 같은 동작을 되풀이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취하는 손짓의 의미도 ‘반가운 영접’이다. 마리아는 천사의 출현에 놀라움을 표현하는 대신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순종의 의사를 밝히는 셈이다.
그림의 소실선들은 보는 이의 시점에 대응하는 화면 위의 한 점으로 일제히 수렴한다. 보티첼리는 선형 원근법을 설득력 있게 실행한다. 삼차원적 공간을 이차원의 그림 평면 위에 옮겨내는 일은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가 회피할 수 없는 숙제와 같았다. 수학과 기하학의 권위를 빌어서 회화를 자유예술의 지위에 올리려는 열망이 원근법적 회화라는 이름으로 나타났다.
보티첼리가 그린 <수태고지>를 두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천사가 마리아를 방 바깥으로 쫓아내려는 것처럼 보인다”고 혹평했다. 혀 없는 붓을 무기 삼아 휘두르는 화가는 말 못하는 벙어리의 손짓과 표정을 보고 배워야 한다고 했던 레오나르도는 천사와 마리아의 과장된 동작이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알베르티가 이 그림을 보았더라면 마리아와 가브리엘이 ‘새장 속에 갇힌 것처럼’ 그려졌다고 비난했을 것이다.
그림 9. 리피의 〈수태고지〉
건축 구성과 인물 구성이 제대로 어울렸다. 무릎꿇은 천사가 마리아를 올려본다. 간이 책상에 기도서를 올려두고 읽던 마리아가 놀랐다. 천사를 돌아보는 마리아의 옷주름이 크게 요동한다. 손바닥을 보이며 치켜올린 왼손은 거부의 의사 또는 감정적 동요를 의미한다. 다섯 가지 반응 가운데 ‘놀라움’의 가장 인간적인 계기가 재현되었다. 그러나 마리아의 표정은 몸짓과 달리 침착하다. 낯선 이에 대한 두려움을 누르고 그의 말뜻을 새기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와 같이 처녀의 미묘한 감정적 변화를 손짓과 자세 그리고 표정의 움직임으로 표현하는 것은 화가의 비길 데 없는 역량이다.
천사는 왼손을 가슴에 얹어서 자신의 의중을 밝히고, 오른손에 백합 송이를 들었다. 순결과 정결과 무염시태를 상징하는 순백의 백합이 눈부시게 빛난다. 만약 꽃잎이 칼날처럼 생긴 아이리스가 백합을 대신했더라면 마리아의 놀라움은 고통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라는 예언대로 태어날 아기가 감당할 수난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백합을 위한 화병은 이미 준비되었다. 투명한 물병에 맑은 물을 담았다. 북구의 이름난 정물화가들과 겨루어서 조금도 뒤지지 않았던 리피의 솜씨다. 수태고지의 물병은 북구에서 수입한 마리아의 새로운 상징이다. 물병 허리까지 물이 찼다. 밖에서부터 비쳐드는 빛이 물병 바깥 표면에 떨어지면서 물병 안팎과 물 속에 빛점을 떨군다. 물병 그림자가 마리아를 행해서 길게 누운 것도 화가의 자랑이다.
그러나 이런 자연관찰과 실물재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원근법적 구성과 인체 비례는 여전히 완전하지 않다. 건축물들이 내뻗는 소실선들이 중앙 기둥 뒤에서 마구잡이로 충돌한다. 평면 그림을 안쪽으로 둥글게 패인 방패 모양으로 접어서 본다면 낫게 보일지 모르겠다. 게다가 나이 어린 천사의 체구도 마리아에 비해서 거대하게 부풀어 보인다.
리피는 안젤리코와 달리 등장인물과 건축 배경에 일관된 그림자를 새겨 넣었다. 신성의 빛이 지배하는 기적의 공간이 아니라, 자연의 빛이 비쳐드는 현실공간이 수태고지의 현장으로 채택되었다. 리피는 후광을 제외하고 그림으로부터 금색을 완전히 걷어냈다. 마리아와 천사들의 후광도 평면성을 극복하고 자유롭게 움직인다.
그림 10. 크레디의 〈수태고지〉
고대 풍의 건축 실내 마리아의 거처가 마련되었다. 배경 오른쪽에 진녹색 침대보를 늘어뜨린 처녀의 침소가 보인다. 코린토스 식 기둥머리를 얹은 사각 벽주는 고대 유적에서 베껴온 장식들이 필리그란처럼 섬세하다. 코린토스 식 각주와 아치 창이 교차하는 르네상스 식 건축 형태는 알베르티가 설계한 루첼라이 궁 주정면에서 빌려왔다.
크레디는 성령의 비둘기를 그리지 않았다. 빛살도, 성부의 형상도 생략했다. 천사는 백합을 지참하지 않고 마리아는 물병을 갖다두는 일을 잊었다. 천사와 마리아가 서 있는 공간은 조화롭고 여유롭다. 고대의 교훈이 적절한 인체와 공간 사이의 비례를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둘 사이의 간격도 긴박하지 않다. 천사의 전갈에 대해서 마리아는 여유롭게 생각할 시간을 가졌다. 선택의 시간은 아무리 서둘러도 모자라기 마련이다. 보는 이의 시점이 유한과 무한 사이에 걸쳤다. 시선거리는 마리아와 천사 사이의 거리를 넘지 않는다. 마리아는 한 손을 들어서 신성의 은총의 의미를 암시하고, 다른 손으로 옷자락을 거두며 자신의 아랫배를 가리킨다.
그림 하단에는 붓으로 새긴 섬세한 부조가 하와의 이야기를 전한다. 왼쪽부터 하느님의 손짓을 따라서 아담의 옆구리에서 태어나는 하와, 선악과를 아담에게 권하는 하와, 낙원에서 추방되는 아담과 하와가 그려졌다. 하와가 선악과를 취하여 후손에게 원죄의 올가미를 씌웠다면, 마리아는 구원주를 잉태하여 인류의 죄악을 거두고 대속할 것이다. 하와는 인류의 첫 번째 어머니요, 마리아는 인류의 두 번째 어머니다.
그림 11. 다빈치의 〈수태고지〉
레오나르도는 <수태고지>를 스물을 갓 넘겨서 그렸다. 베로키오 공방에서 천사 그림으로 명성을 날린 직후였다. 화가는 집안에서 대화를 주고받던 천사와 마리아를 집 앞 정원 뜨락으로 불러냈다.
수태고지 주제를 너른 가로 규격으로 그린 것은 이채롭다. 그 덕에 공간이 시원해지고 시야가 트였다. 관례적인 실내 건축의 차갑고 딱딱한 소재를 말끔히 치워두고 봄꽃이 속살대는 정원의 향기를 풀어놓았다. 그런 점에서 레오나르도는 한 세대 이전 프라 안젤리코의 전통으로 돌아간 셈이다.
넓은 화면 안에서 천사와 마리아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다. 놀라움과 동요보다는 사색과 반문의 계기가 선택되었다. 그림을 반으로 나누면 왼쪽은 자연이 지배하고 오른쪽은 인위가 차지한다. 신성과 인성의 구분이 공간의 구실을 빌어서 암시되었다.
마리아의 기도서를 올려둔 돌 탁자의 위판은 정방형으로 짜여졌다. 마리아가 등진 건축물에서 사각형 석재들의 줄눈은 선형 원근법의 뼈대를 이룬다. 그러나 천사가 앉은 곳에서는 수학의 흔적이 없다. 공간의 원근은 선형 원근법이 아닌 대안 원근법, 곧 색 원근법, 대기 원근법, 빛 원근법 등에 의해 표현된다. 인간의 천사의 만남에서 레오나르도는 수학적 원근법과 ‘회화적’ 원근법을 나란히 세워두었다.
레오나르도는 1410년 무렵 이후 실행되기 시작한 선형 원근법의 오류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회화론 코덱스에서 짚은 문제는 두 가지였다.
피사체가 투사되는 사람의 안구가 달걀껍질처럼 속이 둥그런 구조인데 그림은 어디까지나 평면 위에 그려지는 것이 첫째 문제였다. 화가가 제아무리 자연을 정확하게 관찰하고 붓으로 옮긴다 하더라도 그림의 중심부에서 가장자리로 갈수록 비례가 엿가락처럼 늘어난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림 패널을 방패처럼 오목하게 제작해야 한다. 그것도 보는 이의 시선거리에 따라서 오목한 정도가 달라져야 하므로 실현 불가능하다.
둘째 문제는 보는 이의 눈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데 있었다. 눈과 대상 사이에 그려지는 시각 피라미드의 정점은 하나. 보는 이가 화면 무한원점에 대응하는 위치에 한쪽 눈을 대고 다른 눈을 감은 채 그림을 본다면 상관없지만, 두 눈을 시각의 전제로 삼을 경우 ‘창문 원근법’의 요술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외눈박이 괴물 퀴클롭스가 아닌 다음에야 완전한 원근의 재현과 수용은 불가능하다.
레오나르도는 천사와 마리아를 굳이 바깥으로 끌어냈다. 실내건축의 수학적 규칙성을 포기한 대신 그가 선택한 것은 자연의 불규칙성이었다. 예술과 과학의 양보 없는 경쟁에서 레오나르도는 수학자 유클리트보다 화가 아펠레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저녁놀이 깔리는 시각이다. 천사는 마리아를 향해서 긴 그림자를 던졌다. 마리아의 이마가 밝게 빛난다. 처녀의 얼굴에는 짙은 기쁨도 무거운 고뇌도 드러나지 않는다. 표정을 빚어내는 화가의 붓이 빛과 그림자의 경계를 섞어두었기 때문이다. 자연과 신성, 신성과 인성이 공간의 원근 속에 부드럽게 녹아들었다. 레오나르도는 저녁 무렵의 눅눅한 대기를 좋아했다. 수학적 비례와 원근법의 규칙도 저녁 무렵 따뜻한 대기 속에 함께 녹았다.
그림 12. 뒤러의 〈서재의 성 히에로니무스〉
햇살이 환히 비쳐드는 서재에 성 히에로니무스가 책상 앞에 앉았다. 라틴 성서 <불가타>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펜을 오른손에 쥐었는데 잉크병은 왼편에 놓였다. 손 그림자가 책장 위에 어른거리지 않았을까? 뒤러는 뉘른베르크의 제 작업실을 성자의 서재인 척 꾸며놓았다.
뒤러의 성 히에로니무스는 늙은 노인이다. 광야에서의 삶이 육신에서 젊음의 물기를 앗아갔다. 화가들은 서재에서 라틴성서를 번역하는 성자를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와 혼동하지 않도록 약속을 몇 가지 정해두었다. 사자가 등장하고 추기경의 복식이나 모자를 걸어두면 성 히에로니무스, 주교의 복식과 모자를 걸치거나 걸어두면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된다. 때로 숟가락이나 조개껍질을 든 어린아이가 동행하기도 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느 날 바닷가를 거닐다가 조개껍질을 가지고 바닷물을 몽땅 퍼내려는 소년을 발견했다는 일화에서 나왔다. 성자는 소년의 철부지 행동을 보면서 감히 절대자를 인식하려는 인간의 만용에 대해 깨달았다고 한다. 뒤러는 서재 뒷벽에 추기경 모자를 보란 듯이 걸어두었다.
성자의 서재에는 책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의 뒷머리를 밝히는 후광이 아니라면 성자를 두고 나이든 동물원 사육사나 교예단 조련사로 혼동할지 모르겠다. 더군다나 화면 안쪽 깊숙이 웅크리고 있어서 방안에 누가 들어앉았는지 찾기도 쉽지 않다.
책상머리에 웅크린 성자의 상체는 놀랄만한 거구이다. 뉘른베르크에 있는 화가의 작업실을 실측해서 성자의 신장을 가늠하면 성자의 신장이 대략 2.20m라는 계산이 나왔다. 그러나 하체는 뜻밖에 빈약해서 비좁은 의자에 너끈히 구겨 넣었다. 뒤러의 관심사는 성스런 성자의 재현이나 라틴성서 번역 장면이 아니었다. 물론 훌륭한 방패 주제이다. 다량으로 찍어낸 동판화였으니 불티나게 팔렸을 것이다.
뒤러는 동판화를 새기면서 회화적 공간과 수학적 공간의 문제를 다룬다. 두 차례 이탈리아를 방문했던 뒤러는 1506년 볼로냐에서 원근법의 원리를 배웠다. 북구 미술에도 공방전통의 ‘비과학적’ 원근법이 이미 실행되고 있었다. 중앙투시도법이라고 불리는 수학적 원근법은 컴퍼스와 자를 가지고 평면도와 입면도를 이어 붙여서 입체적 공간을 생산하는 ‘건축적’ 실행 방법이다. 그러나 대상을 평면 회화에 옮길 경우 가장자리 왜곡이 고민거리였다. 단체 사진을 찍을 때 가장자리에 선 사람의 얼굴과 체구가 넓적하게 퍼져 보이는 것과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예컨대 뒤러 동판화에서 서재 창문턱에 놓인 해골을 중앙투시 원근법으로 재현한다면 기형적으로 납작하게 짜부라지고 만다. 해골이 놓인 위치가 화면 위의 소실점으로부터 거의 대척점을 이루기 때문이다.
과학에 의한 시각의 와해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뒤러는 성자의 주제를 핑곗감으로 사용했다. 동판화의 원주제는 북구 원근법과 이탈리아 원근법의 화해이다. 공방전통의 눈어림 원근법과 과학에 기반한 수학적 원근법을 조화시키는 일은 그에게 새로운 과제였다. 예컨대 책상 앞다리 두 개와 뒷다리 두 개를 연결한 직선이 서로 어긋나 있는 것, 그리고 비스듬히 가로놓인 의자 상판 모서리가 반듯한 직각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수학적 ‘한 눈’ 원근법의 뒤틀림 현상을 바로 잡기 위해서이다.
그림 13. 파르미지아니노의 〈목이 긴 마돈나〉
목이 긴 마돈나의 모습은 불꽃처럼 우미롭다. 매너리즘 화가들은 뱀처럼 똬리치는 형상, 곧 ‘피구라 세르펜티나타’가 가장 완전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고 보았다. 넘실대는 불꽃을 닮았기 때문이다. 불꽃의 미학을 완성한 것은 장님 화가 로마초. 그는 르네상스 조각가 미켈란젤로를 매너리즘 미학 최초의 실현으로 보았다.
“불꽃보다 더 아름다운 형태는 없다. 불꽃은 모든 형태 가운데 가장 풍부한 움직임을 보이면서 원뿔의 형태를 이룬다. 그림 속의 한 인물이 불꽃의 형태를 띤다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화가는 모름지기 이런 피라미드 형태를 움직이는 뱀의 모습, 곧 피구라 세르펜티나타와 연결지어야 한다. 삼킬 듯이 널름대는 불꽃과 뱀의 모습은 동일한 바 있다. 그림 속의 인물은 알파벳 S의 형태로 굽어야 한다. 인체 전체에서도 그렇지만 부분 지체도 그래야 한다”
파르미지아니노의 성모는 자연관찰에서 비롯하지 않는다. 그대신 정신의 우미를 으뜸 가치로 삼는 신플라톤주의의 뼈대에 살을 붙였다. 미학의 사상이 자연의 모방을 앞질렀다. 천품의 ‘타고난’ 아름다움이 예술의 ‘가꾸는’ 아름다움을 눌렀다.
마리아의 오른손은 검지와 중지를 벌린다. 베누스 푸디카, 곧 순결한 아름다움이 자신의 정체와 다르지 않다는 손짓이다. 바닥에 겹쳐둔 두 개의 쿠션 위에 오른발을 올려두었다. 길게 가로누운 아기 예수의 허리를 편안하게 받쳐주려면 차라리 왼발을 올려두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잠든 아기는 왼팔을 맥없이 늘어뜨렸으나 오른손은 어머니의 옷자락을 놓지 못한다.
마리아는 머리를 아래로 비스듬히 젖혀서 아기를 내려다본다. 어깨 뒤로 늘어선 신전 기둥들은 다가올 예수 태형의 수난을 예고한다. 죽은 듯 잠든 아기를 바라보는 성모의 옷자락이 바람 없이 나부낀다. 옷자락을 뒤흔드는 바람은 성모의 내면에 몰아치는 슬픈 격정이다.
그림 왼쪽 상단에 붉고 푸른 휘장이 크게 젖혀졌다. 예수 탄생의 미스터리가 한 눈에 드러났다. 인물 구성의 평온한 균형을 비틀면서 다섯 천사가 그림 왼편으로부터 몰려든다. 천사들은 그림을 들여다보며 수수께끼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보는 이의 심리적 반응을 순차적으로 선취한다. 천사가 들고 있는 은제 항아리는 아기를 잉태한 모태의 견고한 상징일까? 또는 가나의 혼인잔치를 흥겹게 했던 기적의 포도주가 담겼을지 모른다.
배경 오른쪽에서 늙은 예언자가 섰다. 황량한 신전 앞마당에서 두루마리 예언서를 펼쳐들고 머리를 돌려 외친다. 동정녀 잉태를 예언했던 이사야의 모습일까? 그와 마주선 또 한 사람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았다. 발바닥에서 발목까지만 그려진 붓의 유령이다.
먼 지평선이 낮게 깔렸다. 보는 이의 시점이 덩달아 낮아졌다. 그러나 원주 아래 네모난 받침돌들의 대각선 모서리를 연장해서 구해지는 시선거리는 무한히 멀다. 이로써 보는 이의 시점은 시각이 닿을 수 없는 궁극 너머까지 밀려났다. 그만한 시선거리에다 눈을 세우고 읽는다면 마리아와 아기 예수는 시각 피라미드의 바깥으로 퉁겨나갔다. 화가는 인간과 자연을 보는 하나의 시점에다 무한과 신성을 보는 또 다른 시점을 보탰다. 한 그림에 두 개의 무한 원점이 들어섰다. 화가의 붓은 환영과 기적을 응시하는 시각의 위험한 극한에서 서성인다. 요절한 화가 파르미지아니노는 그림을 미완성으로 남겨두었다.
출처: 건축문화 2000년 5월호 [연재]페이지 © 2001 a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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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滿益
1938 황해도 해주
http://www.maniklee.com/index.html
이만익의 그림을 본 사람이라면 시속기 없는 청정무구와
인간본연의 순수성을 그곳에서 읽게 된다.
그가 즐겨 다루는 소재는 고구려 건국 신화의 주몽과
행상 나간 남편의 밤길을 걱정하는 '정읍사', 벼랑의 꽃을 꺽어
수로 부인에게 바친 노옹이며 심청의 효심. 흥부일가의 단란한 행복,
길 떠나는 관음 등 '삼국유사'를 비롯한 우리의 민담.설화의 숨결 속에
살아온 친근한 인물들이 주류를 이룬다.
캔버스에 유채,53*45cm,1982
캔버스에 유채,80*80cm,1982
캔버스에 유채, 53*53cm,1982
캔버스에 유채,65*53cm,1982
캔버스에 유채,60*80cm,1982
캔버스에 유채,41*30cm,1982
캔버스에 유채,97*97cm,1984
캔버스에 유채,130*162cm,1982
캔버스에 유채,130*162cm,1984
캔버스에 유채,112*194cm,1984
캔버스에 유채,130*162cm,1984
캔버스에 유채,112*194cm,1984
캔버스에 유채,97*97cm,1984
캔버스에 유채, 120*110cm,1984
캔버스에 유채, 130*162cm,1986
캔버스에 유채, 160*300cm,1987
캔버스에 유채,130*194cm,1983
캔버스에 유채,100*200cm,1989
이만익의 그림을 본 사람이라면 시속기 없는 청정무구와
인간본연의 순수성을 그곳에서 읽게 된다.
그가 즐겨 다루는 소재는 고구려 건국 신화의 주몽과
행상 나간 남편의 밤길을 걱정하는 '정읍사', 벼랑의 꽃을 꺽어
수로 부인에게 바친 노옹이며 심청의 효심.
흥부일가의 단란한 행복,
길 떠나는 관음 등 '삼국유사'를 비롯한
우리의 민담.설화의 숨결 속에
살아온 친근한 인물들이 주류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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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1 |
▲아이들2 |
▲물고기 |
▲사슴 |
▲가지 |
▲복숭아 |
2005.03.02 18:35 입력 / 2005.03.03 07:12 수정
* 그때가 벌써 80년이었나보다. 이중섭의 은박지 그림 전시회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의 삶을 알고나서 그림이 저리도 천진스러울 수 있다니, 경이로왔던 기억이 난다. 삶의 궁벽이 감히 범치 못하는 것이 예술의 영역일수도 있구나.. 싶었다. 없는 돈에 도록도 산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역시 소실되었다. 미발표 그림이 다시 발견되었다니 새삼 그때의 경이가 되살아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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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rlborough Gallery ''Cockaigne, 1993-2003'' |
n Vincent Desiderio's ambitious new painting, "Cockaigne," six centuries of Western art lie scattered on the floor like the remains of a really great party. A virtuoso representational painter known for his large-scale, postmodernist allegories, Mr. Desiderio worked on the 13-by-9-foot "Cockaigne" on and off for 10 years. On the pages of the books in the painting, he painstakingly reproduced miniature versions of his favorite works by artists ranging from Masaccio, Vermeer and van Eyck to Matisse, Jasper Johns and Chuck Close.
The title is a reference to Pieter Bruegel the Elder's "Land of Cockaigne" (1559), a moral allegory set in a land of plenty where the houses are tiled with cakes, the fences are made of sausages and the fowl fly roasted and ready to eat. The targets in Bruegel's painting were gluttony and sloth; Mr. Desiderio's version is a critique of what he calls "cultural bulimia" — our compulsive consumption of images that only leaves us hungry for more. It is also a comment on the predicament of painting in the 21st century: faced with such a plethora of styles and formal idioms, how is it possible to create something new, something distinctively relevant to our own time? "Cockaigne" is one artist's response to what the critic Harold Bloom called the "anxiety of influence," an attempt, in Mr. Desiderio's words, "to reconfigure the history of art in order to create imaginative space for ourselves." The painting is on display at the Marlborough Gallery, 40 West 57th Street, through Saturday.
Mr. Desiderio was trained as an abstract painter, but in the late 80's he switched to a figurative, old masterly style. However, Abstract Express-ionism remains an important influence. The all-over composition and palette-knifed surfaces of this painting were directly inspired by Willem de Kooning's "Excavation" (1950). He kept a reproduction of the de Kooning pinned to the wall next to his canvas as he worked.
In its early stages, the painting was a flattened, frenetic composition of little squares. As he progressed, Mr. Desiderio transformed each square into a book that seems to lie on a receding plane. Because the perspectival orientation of each book is slightly different, the floor seems to undulate, creating the impression of a sea of floating images.
Mr. Desiderio based the miniature reproductions on illustrations from his own collection of art books. The choices about how they appear in the painting - in or out of focus, obscured by shadows or reflections - were guided by their signif-icance to him rather than by perceptual accuracy. "Even if this scene really existed, this is not how a camera would see it," he said.
The tilted tabletop scattered with the remains of a meal is a direct quote from Bruegel's painting, but here, at the center of the table, sits an empty golden bowl - a conspicuous figure of absence, like a postmodernist piazza in which the center (where traditionally an equestrian statue might have stood) is left empty.
René Magritte's "Treachery of Images" (1929), a painting of a pipe above the legend "Ceci n'est pas un pipe" ("This is not a pipe"), is an icon of Surrealism and a forerunner of modern conceptualism. Prominently placed in the center of the picture, it serves as a sly reminder of the illusory nature of realist painting.
The image of Édouard Manet's "Piper" (1866) appears here, and in several of Mr. Desiderio's earlier paintings, as an emblem of the avant-garde, a heroic figure leading the troops into battle against the status quo - or perhaps just a young boy whistling in the dark.
Of all the illustrations, he found this Picasso portrait, "Leaning Woman" (1939), the most difficult image to reproduce because "Picasso's marks are so aggressively counter-intuitive."
Mr. Desiderio's last gesture upon completing the painting was to use a palette knife to apply white paint to this image of Marcel Duchamp's "Chocolate Grinder" (1913) - a figure connoting mindless consumption - so that the page of the book appears torn to shre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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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은 2004년 6월 2일부터 덕수궁미술관에서 <2004 올해의 작가 : 정점식>전을 개최한다고 한다. 소개에 따르면,
극재(克哉) 정점식은 1917년 경상북도 성주에서 출생하여 1950년대 이래 현재까지 대구에서 활동하면서 대구화단의 발전과 미술교육에 지대한 역할을 담당해온 작가이다. '극재' 곧 '이겨낼 수 있을까?' 라는 독특한 호를 가진 작가는 1930년대의 대구화단 선배들(김용조,서진달, 박재봉)을 통해 처음 유화를 접했으나 이들의 유산을 뛰어넘으려 애썼으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이 아닌 세계의 본질에 근접한 예술형식을 추구해왔다.이번 전시는 1940년대 하얼빈 체류기의 드로잉에서부터 2004년 근작에 이르는 작가의 전 시기의 작품 60여점과 책 장정본, 팜플렛 디자인 등의 관련자료 20여점이 선보인다. 전시는 8월 8일까지 계속된다.
'세계의 본질에 근접한 예술형식'이니 하는 현란한 수식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싶어 그의 작품을 찾아보았다. 그의 작품은 정점식 또는 Kukjae.org (극재 정점식 홈페이지)에서 감상할 수 있다.
솔직히 그의 그림은 그닥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글 하나가, 쿵, 가슴 속으로 떨어졌다. 수적(手跡)이란 제목의 에세이다.
고호, Dr. Gachet의 초상, 82,5 Millionen Dollar , 2위
루벤스, 죄없는 자들의 학살, 76,7 Millionen Dollar. 4위
고흐, 수염없는 예술가의 초상, 71,5 Millionen Dollar, 5위
세잔, 커튼 항아리 과일접시가 있는 정물, 60,5 Millionen Dollar, 6위
피카소, 팔짱 낀 여인, 55 Millionen Dollar, 7위
피카소, 정원에 앉아있는 여인, 49,5 Millionen Dollar , 10위
출처: Spiegel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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