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아직도 1999년 3-4월호 [플래시 아트]를 갖고 있다. 그동안 뉴욕에선 보기 힘들었던, 젊은 영국 예술가(YBA) 중 한 명인 덱스터 달우드(Dexter Dalwood)의 작품이 표지에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여왕의 침실」이라는 이 그림은 빨강, 노랑, 파랑의 과감한 원색으로 바닥, 벽, 천장을 이룬 실내를 묘사하고 있다. 번쩍이는 샹들리에와 로코코 풍 창문 위 장식이 있다 해도 여왕의 침실치고는 상당히 현대적인 것 같다. 휑한 침실 안에는 여왕의 것이라곤 믿기 힘든, 부서질 듯 연약한 모습의 침대가 놓여있고, 한편에는 요즘 구경하기 힘든 전기 난로에 불이 켜 있다. 방안은 전혀 데워지지 않을 것 같다. 아키아(IKEA)에서 산 것 같은 옷장은 한쪽 문이 열려있는데,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파티용 드레스라기보단 올드 네이비 티셔츠 더미 같다. 그의 페인팅 기법 또한 재미있다. 완전히 평평한 표면과 성긴 붓 자국이 감각적인 대조를 이룬다. 샹들리에는 진짜 샹들리에처럼 보이길 포기한 듯 그려졌다. 스프레이로 물감을 뿌린 자국도 있다. 무엇보다 그림은 여왕의 침실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은밀한 쾌감을 준다. 그러나 이 그림은 실제 여왕의 침실이 아닌 달우드의 상상력의 소산이다. 백 퍼센트 말이 되는 건 아니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의 침실을 본 적이 없는 나는 ‘음 그럴 수도 있어’, 라고 수긍한다. 게다가 멋지지 않은가.「여왕의 침실」은 내 머리 속에서 서서히 군림을 시작한다.
만일 덱스터 달우드가 내년쯤 한국에서 전시할 계획이었다면 그는 지금쯤 (생각하기도 끔찍하지만) 김선일 씨가 이라크에서 감금되었던 방을 작품으로 구상 중이었을지도 모른다. 체액과 핏자국으로 더러워진 매트리스가 방안에 덩그러니 놓여있고, 그 옆에는 검은색 복면, 디지털 캠코더 따위가 망명 정부의 지폐처럼 굴러다니고 있었을까. 아마도 페인팅 기법은 필립 거스통의 것을 쓰는 것이 적당하지 않을까…. (그 대신 달우드는 마침내, 뉴욕에 있는 가고시안 갤러리에서 지금 전시 중이다.)
이쯤 되면 짐작하겠지만 달우드는 그가 가보지 못한 명사들의 거처나 유명한 장소를 그리는 작가이다. 신문이나 잡지, 텔레비전에서 육하원칙에 의거하여 끊임없이 우리에게 정보를 전달해주지만 우리는 결국 무기력감에 사로잡힌다. 진짜로(!) 무슨 일이, 어떻게, 왜 일어났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뭔가 우리가 모르는 음모가 있는 게 틀림없어, 하는 식이다. 달우드는 우리 머리 속에 있는 바로 이런 ‘공백’을 파고 든다. 우리가 갈망하는 지식의 공백, 권력의 공백을 채우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이런 의심을 즐기고 있다고 말한 존 피스크의 ‘쾌락적 회의’를 떠올린다면 달우드는 우리의 ‘진실게임’을 한층 흥미진진하게 하는 일종의 엔터테이너이다. 예를 들어 그의 그림 「빌 게이츠의 침실」을 보자. 그가 싸구려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른다는 사실은 보도 사진으로 확인 가능하지만 정말로, 그런 부자는 어떻게 살까 궁금한 것이 사실이다. 달우드가 그린 빌 게이츠의 침실에는 부자 취향대로 플랫티비가 걸려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가 보는 것은 구닥다리 소형 TV (또는 컴퓨터 모니터)인 것 같다. 실내는 왠지 협소한 느낌이다. 이것이 실제 그의 침실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부자도 별 거 아니군.’ 이라는 착각 혹은 ‘변태적인’ 위안을 받게 된다.

그가 이렇게 대중의 상상력의 공백을 파고 드는 방식은 대중문화와 미술사(기법을 포함한)의 ‘짜집기’ 방식이다. 그의 짜집기는 형태와 내용 모두에 적용된다. 우선 그는 먼저 그의 상상력에 들어맞는 잡지의 이미지를 오려내어 콜라쥬를 만든다. 그러니까 오려 붙인 것 듯 보이는 샹들리에는 우연이 아니다. 잡지 콜라쥬에서 그림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그는 미술사적 짜집기를 수행한다. 롤링 스톤즈의 기타리스트였던 브라이언 존스가 익사한 수영장을 그린「브라이언 존스의 수영장」은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화가 클리포드 스틸의 그림을 닮아있다. 철 지난 수영장, 물에 빠져 죽은 비극의 팝 아이콘, 한물 간 화가…(스틸은 죽은 후보다 살아서 더 ‘잘 나갔던’ 작가이다) 이렇게 알싸한 페이소스를 불러일으키는 조합이 또 있을까.
뿐만 아니다. 「마오쩌둥의 서재」는 전체적으로 프랭크 스텔라의 「블랙 페인팅」 연작을 연상시키고, 서재에 걸린 마오쩌둥의 사진은 앤디 워홀을 생각나게 한다. 양 옆으로는 창문을 통해 이발소 그림 같은 동양의 풍경이 펼쳐진다. 어쩔 수 없이 미니멀리즘과 팝아트가 부딪히고, 키치와 죽어버린 공산주의가 몸을 뒤섞고 있는 것이다.

이번 뉴욕 전시에 걸린 「클라우스 본뷸러」를 보자. 클라우스 본뷸러는 아내 서니 본뷸러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가 결국 무죄로 풀려난 인물이다. 그의 거실에는 프란시스 베이컨이 자주 쓰는 색이 사용되었고, 벽 위엔 그의 그림까지 걸려있다. 다른 쪽 벽에는 로버트 롱고의 비틀거리는 남자의 그림이 보인다. 달우드는 이 그림의 실내를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에서 따왔다고 말한다. 이쯤 되면 내 머리 속에서 혼란이 일어난다. 나는 실제로 본뷸러 집안을 본 것은 아니지만 그들을 소재로 한 영화 [행운의 반전]을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영화 속 그들의 실내와 그림은 상충하는 것이다. [행운의 반전]을 모를 리 없는 달우드는 의도적으로 다른 영화를 택했고, 또 전혀 다른 분위기의 인테리어를 그림 속에 들여놓은 것이다. 기억하겠지만 [아메리칸 사이코]는 말도 안되게 잔인하지 않았던가. 베이컨의 그림 역시 기괴하고, 롱고의 남자는 총이나 칼에 맞은 것처럼 비틀거린다. 달우드는 이런 ‘끔찍한’ 짜집기를 통해 인간의 뒤틀린 이면을 연상시킨다. 이를 통해 내 머리 속에 의심 없이 들어앉아 있는 허구의 이미지를 몰아낼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허구의 이미지들이 서로 진짜라고 우기며 경쟁하는 형국이 촉발된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그의 날조된 이미지가 단순히 ‘공백’을 채울 때와는 달리 더 큰 위세를 획득한다. 내 머리 속의 현실을 검증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권력의 쾌감을 주겠다는 건지, 그가 권력을 차지하겠다는 건지 일이 점점 복잡해진다. 어쨌거나 그의 그림은 미술사 속의 기법들을 망라한 회화의 향연이고, 어쩌면 그가 노리는 것은 회화의 권력 회복일지도 모르겠다.
커트 코베인의 온실

니체의 산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