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대째 화가 배출한 한국최고의 예맥(藝脈) |
“진도의 양천 허씨들은 빗자락 몽둥이만 들어도 명필이 나온다”는 유행어의 근원지인 운림산방. 내리 5대째 유명화가를 배출한 이 산방의 비밀은 과연 무엇일까? | ||
조용헌 <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 ||
![]() 당대발복(當代發福)에 끝나지 않고 그 발복의 가업을 대를 이어 나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조부대에 하던 일을 손자대에서까지 계속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한국의 근세 100년처럼 자신들의 전통과 민속이 총체적으로 단절되고 해체되는 과정을 겪어야 했던 나라에서 선대에 하던 일을 손자대가 계승하는 경우는 희귀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그 희귀한 사례가 이번에 찾아가는 운림산방(雲林山房)이다. 전남 진도에 자리잡은 운림산방을 중심으로 하여 5대째 내리 화가를 배출한 집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진도에 사는 양천 허씨(陽川 許氏) 집안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아마 5대째 계속해서 예술가를 배출하는 집안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도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1대는 소치 허련(小痴 許鍊:1808∼1893), 2대는 미산 허형(米山 許瀅:1861∼1938), 3대는 남농 허건(南農 許楗:1908∼1987)과 그 동생인 임인 허림(林人 許林:1917∼1942), 4대는 임인의 아들인 임전 허문(林田 許文:1941∼현재), 5대는 남농의 손자인 허진(許塡:1962∼현재)으로 이어지고 있다. 허진 이외에도 같은 5대 항렬로는 허재, 허청규, 허은이 화가의 길을 가고 있다. 그런가 하면 무등산 춘설헌(春雪軒)의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1891∼1977)도 진도에서 태어난 양천 허씨로 같은 집안이다. |
허씨들은 원래 경기도에서 살다가 진도로 내려왔다고 한다. 진도에 처음 들어와서 살기 시작한 입도조(入島祖) 허대(許垈)는 임해군의 처조카였다. 광해군 즉위 후 임해군이 역모로 몰리면서 임해군을 수행하기 위해 먼저 진도로 들어왔다가 그대로 눌러앉은 것이다. | ||

문인들의 유배지, 진도 | ||
전라남도에서 유배지로 유명한 섬이 두 군데 있는데, 하나가 진도이고 다른 하나는 완도라고 한다. 진도는 주로 붓을 다루던 문인(文人)들의 유배지였고, 완도는 칼을 다루던 무인(武人)들의 유배지였다. 진도는 완도에 비해 농토가 많기 때문에 책만 읽던 문인들이 유배 와서도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게 했고, 완도는 산과 바다뿐인 척박한 지형이라서 상대적으로 힘 센 무인들을 보내서 개척하게 했다고 한다. | ||

녹우당 영향받은 소치 허련 | ||
그렇다보니 진도 남자들은 대체로 노래나 그림을 잘 그리는 한량이 많고, 여자들은 한량 대신에 생계를 책임지느라 생활력이 특히 강하다는 정평이 있다. 진도 여자 치고 외지에 나가서 못 사는 사람이 적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 ||

초의선사와 추사를 스승으로 | ||
소치는 녹우당을 출입하면서 초의선사(艸衣禪師:1786∼1866)에 대한 소문을 접한다. 초의선사가 주석하던 대둔사(大屯寺)는 녹우당에서 걸어서 한나절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 ||

임금이 후원자가 되다 | ||
소치는 서울 추사 집에서 1년 정도 머물렀다. 더 머무를 수 없었던 이유는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소치는 유배중인 스승을 찾아 뵙기 위하여 당시에는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바닷길인 제주도에 세 번이나 다녀오기도 하였다.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 ||

자연과의 일체 추구하는 남종화 | ||
남종화. 소치가 일생 동안 그린 그림의 화풍이다. 남종화는 북종화와 대척점에 서는 화풍을 일컫는다. 정치의 중심지인 북경과 경제의 중심지인 상해로 나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중국에는 몇 가지 남과 북이 있다. | ||

녹우당과 비슷한 운림산방 | ||
운림산방은 바로 이러한 남종화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지은 집이다. 보통 주택처럼 실용이 목적이 아니라 주변 풍광의 아름다움을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려는 용도로 지은 남종화가의 거처라는 데 다른 명택들과 구별되는 특징이 있는 것이다. | ||

인공으로 조성된 운림지 | ||
필자는 운림산방과 녹우당의 풍수형국이 여러 가지로 흡사한 부분을 보면서,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생각하였다. 소치가 이곳을 잡을 때 녹우당을 모델로 하였음에 틀림없다. 소치의 예술세계가 녹우당으로부터 영향받았음을 고려해볼 때 입지선정부터 녹우당과 비슷한 곳을 선호했을 가능성이 높다. 해남의 녹우당이 대장원이라면 진도의 운림산방은 그보다 약간 규모가 작은 소장원에 해당한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리라. | ||

150년 된 토종 백일홍과 100만 그루의 동백나무 | ||
운림지 한가운데는 조그마한 섬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백일홍을 심어두었다. 소치가 직접 심은 것이라고 하니 줄잡아 150년은 된 백일홍이다. 그냥 백일홍이 아니고 토종 백일홍이란다. | ||

불우한 천재, 남농 허건 | ||
남농은 조부 소치의 예술혼이 뭉쳐 있는 운림산방에서 태어나서 강진 병영을 거쳐 목포 유달산 밑의 죽동에 정착하여 활동하다가 말년에는 남농 기념관에서 지냈다. | ||

무등산 춘설헌의 허백련 | ||
이러한 인품이니 목포 사람들은 남농을 목포의 어른으로 생각하였다. 남농으로부터 나오는 그림을 가지고 줄잡아 200명이 먹고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실제로 남농이 죽은 후 목포시내 화랑경기가 현저하게 위축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남농은 그 자신이 평생 수집한 수석 2000점을 향토문화회관에 기증하였고, 자신의 그림은 남농미술문화재단에, 그리고 쇠락한 운림산방을 복원한 다음에 진도군에 기증하였다. 죽기 전에 모두 사회에 주고 간 것이다. | ||

남농미술관과 의재미술관 | ||
한때 지운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국화가 무척 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면회 갈 엄두도 내지 못하던 살벌한 시절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의재는 친구를 위해서 국화를 그려 감옥에 보냈다. 춘설헌 앞의 화초들은 모두 지운이 와서 심어 놓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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