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해당되는 글 12건
- 2007.08.26 :: 80년대의 주요사건
- 2007.07.30 :: 항일투사 김남극
- 2007.07.07 :: 다리의 애환/ 하원호
- 2005.09.27 :: 사북, 부마항쟁과 광주민중항쟁을 잇는 징검다리
- 2005.09.27 :: '사북사태'의 진실, 동원탄좌 시위 조사보고서
- 2005.05.06 :: [펌] 종두법은 일제의 작품...주체 실종된 한국의사
- 2005.03.23 :: 한중일 공동집필 역사교과서
- 2004.12.31 :: 우리 역사관련 링크 사이트
- 2004.11.28 :: [특집기획]친일언론 현대사-1부
- 2004.10.09 :: 한국방송(KBS)의 '위대한 여정, 한국어' 3부작
- 2004.09.29 :: '식민지 근대화론'의 문제점
- 2004.09.29 :: 반론 : '고구려사 담론을 비판한다'(교수신문 326호)을 읽고
80년대의 주요 사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80년: 5월 서울역 집결 학생들의 '회군', 광주민중항쟁.
- 82년: 학생운동 내에서 정치노선 논쟁 본격화(경제투쟁-정치투쟁의 관계 문제, 운동주도체 문제 등)
- 84년: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 "노동자계급 관점에 선" 변혁운동 및 조직 주창. 기관지 {깃발}.
- 85년: 조합주의적 노동운동의 틀을 깨고 정치투쟁 영역을 개척했다는 구로동맹파업을 계기로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조직됨. "노동자가 억압받지 않는 사회" 표방. "정치적 집단"을 결성하고 이 정치적 조직이 선도적 정치투쟁을 통해 대중의 의식을 고양시켜 대중을 정치투쟁으로 이끈다는 '선도적 정치투쟁론'과 '대중정치조직(MPO)'론 제시.
- 84년: 연말부터 CNP논쟁. 민투위, 서노련은 민족민주혁명론(NDR론).
- 85년: * 박현채(국독자론)와 이대근(주변부자본주의론)의 논쟁.
*식민지반봉건사회론/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론과 민주기지론에 입각한 연방제통일론 확산. 이 NL(민족해방)노선이 곧 학생운동의 주도세력이 됨.
* 제헌의회(CA)그룹,『한국사회의 성격과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임무}에서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NDR론' 제시. NL/CA 대립구도 형성. - 87년: * 87민중항쟁, 노동자대투쟁, 대선.
*PD(민중민주) 그룹 형성(인민노련도 처음엔 PD 주장). NL/PD 대립구도 형성.
* 페레스트로이카 파고 밀려오기 시작. - 88년: * 연초 종속약화(=자립화)/개량화를 전망하면서 6.29 이후의 정세변화를 자본주의 발전의 고도화에 의해 추동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로의 이행'으로 파악하는 견해 출현(인민노련) → '일반민주주의(GD)적 투쟁', '개혁대안(=민주대안)론'으로 정식화됨. 종속약화론에 '신사고'의 '상호의존성론'이 결합.
*NL/GD(?)/PD 대립구도 형성됨. 별도로 트로츠키주의적 비판 등장.
* 전민련 건설 논쟁. - 89년: 베를린 장벽붕괴.
- 90년: 전민련 분열. 전민련내 진보정당 논쟁.
- 91년: 소련붕괴.
출처: 80년대말·90년대초 변혁운동의 이론 정세[서관모.99년 3월 6일 오후 2시 -7시 숭실대 사회봉사관 212호실에서 개최된 '진보정론지 발간을 위한 토론회"에서 발표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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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독립투사의 비문에 거짓 글발을 날렸나
중국 훈춘시 영안향 대황구촌에 가면 독립투사 김남극의 묘지를 만날 수 있다. 깨끗하게 정돈된 그의 묘비 기단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다. ‘대한민국 대통령 노태우, 국무총리 정원식 1999년 10월 17일 세움.’ 지나치게 뜬금 없는 비문이다. 1999년에 대통령 노태우라니. 이 비석과 인연이 깊은 연변대학 최용린 교수를 통해 비문에 얽힌 일화를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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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한국역사연구회
1950년 12월 초 AP통신의 종군기자 막스 데스포는 대동강에서 한 장의 사진을 찍었다. 북진하던 유엔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평양을 포기하기로 한 것은 12월 4일이었다. 유엔군은 운반할 수 없는 군수품과 보급품은 소각하고 탄약고와 유류저장고를 폭파한 뒤 대동강을 건너 임진강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중공군의 추격을 막으려고 대동강 철교를 폭파시켜 버렸다. 후퇴하던 데스포 일행이 대동강 철교에 이르렀을 때 수많은 피난민들이 철교에 올라 있었다. 그들은 한겨울의 대동강을 헤엄쳐 철교에 간신히 이른 다음 망가진 교각을 잡고서 생사의 곡예를 벌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물에 떨어져 죽었다. 이때 막스 데스포가 찍은 한 장 의 사진 「폭파된 대동강 철교」는 어떤 말보다 6.25전쟁의 참상을 극명하게 증언해 주었고, 한국전쟁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진 중 하나인 이 사진으로 그는 1951년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다리는 어느 나라 문학에서도 연결의 장소요 만남의 장소로 쓰이는 소재이다. 그러나 전쟁의 와중에서 끊겨진 우리의 한강다리나 대동강철교는 단절과 이별을 상징하는 장소일 수밖에 없다. 이 다리들은 전쟁 후에 다시 복구되었지만 반세기가 넘도록 분단된 우리의 현실 속에, 이산가족의 가슴 속에는 여전히 끊겨진 다리가 이어지지 못한 채 그대로 남아있다.
우리나라에서 다리에 대한 이야기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주몽이 부여를 탈출할 때의 이야기다. 지금의 압록강 북동쪽 엄호수에 주몽일행이 이르렀는데 다리가 없었다. 주몽이 물을 향해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자다. 오늘 도망하다가 뒤쫓는 자들에게 잡히게 되었으니 어쩌면 좋겠는가?”라고 했다. 그러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떠올라 다리를 이루었다. 주몽 일행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는 곧 흩어졌다. 이 신화에서 다리는 새로운 세계와의 연결과 신천지의 입구로서의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주몽이 건너간 세계는 그가 개척할 희망의 곳이었고, 강 이쪽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땅이었다.
다리는 주몽이 강을 건너던 때보다 먼저 있어 왔겠지만, 기록에 나타난 최초의 다리는 고구려 때인 413년에 완공된 평양주대교(平壤州大橋)로서, 그 위치는 알 수 없고 당시로서는 상당히 대대적인 공사로 진행된 듯하다. 그런데 1981년 여름 북한의 행정구역상 평양시 대동강구역 휴암동과 대성구역 사이에 있었던 고구려시대의 다리가 발견되었다. 조사발굴 사업은 휴암동 쪽에서 진행되었는데, 다리의 첫머리 부분 구조물은 10 ㎝ 정도의 두께로 덧쌓인 자갈과 모래층 밑에서 드러났다. 골조물의 대부분은 길이 670 ㎝ , 너비 38 ㎝ , 두께 26 ㎝ 가량 되는 밤나무 각재이다. 다리의 입구 부분에는 첫머리 부분에서부터 밖으로 부채살처럼 퍼진 깔판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으며 본래의 모습이 잘 남아 있다. 다리의 첫머리 부분에는 교각과 교각 사이에 놓였던 골조가 땅에 묻힌 채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강 건너편 천호동 쪽에서는 2개의 교각기둥이 강바닥에 박힌 채로 남아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 다리는 쇠못이나 꺽쇠를 비롯한 그 어떤 쇠붙이도 쓰지 않고, 모든 이음새를 네 갈래로 오려내 맞추는 사개물림으로 해 견고하게 만들어졌다. 이 다리는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427년(장수왕 15) 이후에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래서 본격적이고 진보된 기술과 형식을 갖춘 다리는 삼국시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데 삼국시대의 다리는 국가 정책으로 축조한 것이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일부는 마을 자체의 필요성에 따른 자발적인 것도 있었다. 일본에 다리 가설 기술을 전해 준 쪽도 백제였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612년에 백제의 토목기술자 노자공(路子公)이 일본에 건너가서 현재 일본의 3대 기물(奇物)의 하나로 불리는 오교(吳橋)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다리 중 가장 오래된 다리는 신라때 건설되었다. 불국사의 청운교, 백운교와 연화교, 칠보교가 바로 그것이다. 그 뒤에도 수많은 사찰의 다리가 만들어 졌지만 절간의 다리라는 구조물은 천상의 불국(佛國)과 지상의 속세를 연결하는 상징성을 내포한다.
그런데 이 같은 종교적 다리 보다는 우리 같은 속인들에게는 원효의 문천교에 더 마음이 끌린다. 원효가 어느 날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겠는가? 나는 하늘 받칠 기둥 찍으련다.” 태종 무열왕이 이 노래를 듣고 과부로 있던 요석공주와 맺어주려고 관리를 시켜 원효를 찾게 했다. 관리는 문천교를 지나다가 원효를 만났는데 원효는 일부러 물 속에 떨어져 옷을 적시게 되었고 요석궁으로 가서 옷을 말렸다. 얼마 후 요석공주는 아기를 가졌고 그 아이가 설총이었다. 원효의 다리는 요석공주와의 인연의 다리였고 세상을 열어나갈 새로운 탄생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가장 큰 다리는 항상 가설된 것은 아니지만 필요에 따라 만들어 졌던 한강의 배다리였다. 배를 엮어 강을 건널 수 있게 만든 부교(浮橋)인 이 배다리는 이미 고려 때도 임진강에 설치한 적이 있고, 연산군이 한강 남쪽의 청계산에서 사냥을 즐기려고 민간의 배 800 척을 동원해 놓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가장 유명한 배다리는 정조때 만들어진 것이었다. 효심이 지극했던 정조는 아버지의 무덤을 양주에서 화성으로 이장해 융릉을 만든 뒤 능에 참배하기 위해 처음에는 한강에 선창을 양쪽에 만들어 배를 타고 건넜지만, 1790년(정조 14)에 주교(舟橋)를 가설했다. 이 배다리의 운영과 관리는 주교사(舟橋司)가 맡았고, 배다리의 운영방안을 정한 책인 ?주교지남?을 정조가 직접 편찬했다. ?주교지남?과 ?주교사절목?에 적힌 주교제작에는 교배선 38척, 좌우위호선 12척, 난간선 240척, 홍전문 3개를 설치하도록 했는데 홍전문은 주교의 남북과 중앙에 설치되었고, 배를 엮을 때 큰 배는 강 가운데 작은 배는 강변에 놓아 가운데가 높게 만들었다. 여기에 동원된 배들은 충청도의 조운선과 강화도에 있던 훈련도감의 배 등 관선들이었지만 점차 민간의 배도 징발했다. 나중에는 훈련도감 배와 서울의 경강상인들이 소유하던 경강사선(京江私船) 중에서 큰 것이 고정적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그리고 경강상인들에게는 정기적으로 주교가설에 참여하는 대가로 전라도와 충청도의 대동미를 독점 운송하는 특권이 주어졌다. 이 경강선들은 관의 비호를 받으면서 조선후기 해운의 주류를 이루었고 경강상인들이 자본을 축적하는 주요수단이기도 했다.
근대적 다리로 최초로 만들어진 것은 1900년 7월에 준공된 한강철교였다. 경인선 건설과정에서 만들어진 한강철교는 근대의 상징물과 같았다. 1896년 경인철도부설권을 따낸 미국인 J. R. 모스는 한강철교 가설을 위해 미국에서 설계 및 철도교 자재가 도입했다가 공사도중에 일본이 부설권을 인수해서 준공했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에서의 원료수송과 상품수출을 위해 철도를 식민지 국가에 건설했다. 제국주의가 강요한 근대의 상징적 구조물은 무엇보다 철도였고, 철교는 그 구조물의 중심에 있었다. 따라서 한강철교는 단순한 우리 내부의 연결과 만남의 장소에 그치지 않고 제국주의의 수탈을 위한 거대한 구조물이었던 것이다.

지금이야 한강만 해도 다리가 몇 개나 있는지 일일이 헤아리지 않으면 어렵고 또 새로운 다리가 금방 들어서는 세상이다. 하지만 우리 가슴에 남아 있는 대동강 다리같은 끊겨진 철교의 기억은 분단의 현실에서 지울 수 없는 상징물이 되어 있다. 또 엘리옷(Eliot, T. S)은 ?황무지?에서 런던교의 붕괴를 현대 문명의 몰락으로 상징했지만, 김영삼정권 시절에 무너진 우리의 성수대교도 박정희 정권이후 정신없이 달려온 우리 근대화의 허구를 보여주는 자화상이다.
필진 : 하원호 | 등록일 : 2004-12-31 | 조회 :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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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찬 / 아주대․醫史學
역사학자가 자신의 연구 대상으로 삼는 인물, 사건, 행위, 구조는, 서재필과 필립 제이손에 대한 해석에서 볼 수 있듯이, 지리적, 공간적 축의 관점에서 본다면, 전지구적인 관련성(global network)을 갖게 된다. 시간의 축에서만 역사를 바라보게 되면, 서재필에 관한 기존의 연구에서 볼 수 있듯이, 일국적인 관점에서 역사 연구를 하게 되는 함정에 빠진다.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의 상대적 관계는 자연과학의 세계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역사학자와 자신의 연구 대상 사이에도 그대로 해당된다. 요즘은 별로 이런 구분을 잘하지 않는데, 학자들 사이에는 ‘국내파’와 ‘해외파’라는 구별이 있었다. 이 단어를 일종의 메타퍼로 사용해보고자 한다. 연구 환경이 좋아져 ‘국내파’들도 해외에서 연구할 기회들을 많이 갖게 된다. ‘관찰자’의 공간적 위치가 바뀌게 된 것이다. 한국사 또는 한국학을 전공하는 수많은 학자들이, 한국에 대해 역사적으로 더욱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중국 또는 일본보다 미국과 영국에서 일정 기간 연구를 하게 될 경우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의 상대적 관계도 시공간적 축에 따라 변화할 것이다. 하지만, 귀국한 국내파들의 연구는 다시 ‘일국적’ 관찰 틀로 고착된다. 관찰자가 일국적인 지리-공간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종두술, 메이지 일본과 조선 사이의 ‘共鳴’
제국주의의 정신은, 자국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고 인구를 관리하기 위해선 국토를 더욱 확대하는 데 있다. 메이지 일본으로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조선을 일본 ‘근대의 실험실’로 삼았다. 실험실에서는 균주(colony)를 배양한다. 식민지(colony)에 대한 통치는 주권적 권력만으로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신진 관료들은 조선인의 몸을 통제하지 않으면 조선을 지배하기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안 것이다. 메이지 일본이 볼 때, 종두술은 바로 조선인의 몸에 대한 ‘통치의 術에 아주 적절했다. 메이지 일본이 근대 의학을 활용하여 조선인(그리고 대만인)의 몸을 제국에 순종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논리적 비약일지 모르겠지만, 메이지 일본이 조선에 대한 제국주의적 이해를 적극적으로 표명하였던 다른 나라와 근본적으로 달랐던 점은, 제국의 군사적 경계선을 유지하고 확대하려면, 경계선 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몸을 통제할 수 있는, 위생의 경계선(sanitary cordon)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꿰뚫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이 을사조약(1905)이라는 단계적 절차를 거친 후에 ‘內鮮一體’를 내세워 조선을 합병한 한 것은, 조선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선 합병에 드는 비용보다 합병으로 인한 편익이 더욱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합병을 위해 조선에 대한 위생 정책도 변해야 했다. 일본 사람을 조선 사람으로부터 격리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일본 사람들이 조선 사회에서 마음대로 활동하기 위해선, 조선 사람들에게도 접종(vaccination)을 적극적으로 실시해야 했다. 그것은 일본 민족을 보호(vacci-Nation)하기 위한 의학적 전략인 셈이다. 러일전쟁에 미국의 장군으로서 참여하였던 루이스 시만(Louis L. Seaman)은 이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일본은 전쟁에서 가장 큰 적이 적군이 아니라, 방심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하기 하지만, 그래도 예방이 가능한 질병이라는 사실을 세계에서 제일 먼저 인식한 나라이다”라고 말한 것.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明治 일본은 경성, 부산, 원산, 인천에만 있던 병원을 조선 전역으로 확대해나갔다. 이는 다시 말해서, 규율적 권력의 확대를 의미했다. 이번에는 자혜의원과 동인회가 주축이 되었다. 明治 ‘위생의 제국’을 건설하는 데 가장 앞장섰던 인물 중의 하나인 다카키 가네히로高木兼寬는 1887년에 慈惠醫院을 설립하고, 1891년에 자혜의원의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를 졸업한 金益南은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한 최초의 조선인으로서 졸업을 한 후, 1904년에 지석영이 교장으로 있는 의학교 교관으로 부임하였으며 1904년에 육군 삼등군의로 전보되었다. 明治 통치자들은 자혜의원을 조선에도 설립하여 규율적 권력을 더욱 확대해갔다. 1909년에 함흥, 청주, 전주에 설치되었고, 다음해 14개의 자혜의원이 전국 주요 도시에 설립되었다. 제국의 통치자들은 병원 공간이 제국의 ‘경계선’을 확장하는 데 기여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요컨대 전국의 자혜의원들은 ‘위생의 경계초소’로 기능함으로써, 明治 일본이 만들어가려는 조선에 대한 ‘통치의 경계선’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한국의 중고등교육에서 세계사 과목이 급속히 축소 또는 폐쇄되고 있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문제는 역사학자들 스스로 역사를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로 철저히 구분하여 경계를 가로지르는 작업에 대해 인색하다는 점이다. 과학사, 의학사 분야도 이런 점에서 마찬가지다. ‘제국의 꿈’과 ‘세계화의 덫’
푸코가 '성의 역사' 1권을 ‘국가 인종주의의 탄생’이라는 제목으로 바꾸어 발표했던 콜레쥬 드 프랑스에 가보면, 클로드 베르나르(Claude Bernard, 1813~1878)의 큰 동상이 서 있다. 여기를 방문하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에밀 졸라(Emile Zola)와 에른스트 르낭(Ernst Renan) 등 당대 프랑스 지식인들의 필독서였던 '실험의학 연구 서론'을 썼던 이 의학자를 아마도 그냥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콩트(Auguste Comte, 1798~1857)의 ‘외부 환경’에 대응하여 ‘내부 환경’이라는 개념을 창안했던 그는 “의사, 시인, 철학자들이 모두 같은 언어로 말하게 되는 날이 언젠가 오리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영국에 H.G. 웰즈가 있었다면, 얼추 비슷한 시기의 프랑스에는 쥘 베른 - 그리고 장 콕토의 '다시 떠난 80일간의 세계일주'-이 있다. 공상 과학은 제국의 꿈을 실현시켜주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이런 류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제국을 전 세계로 펼쳐나가리라는 원대한 꿈을 갖게 된 것이다. 마르코 폴로의 '세계의 서술'을 읽고 ‘신세계’라는 ‘상상의 지리’imaginary geography를 탐험하였던 ‘콜럼버스’는 19세기 후반에, 쥘 베른과 웰즈를 읽고 전 세계를 누비는 수많은 ‘제국주의자’들이 되었다. 2005년인 지금에도 ‘80일간의 세계 일주’란 말로만 들어도 얼마나 사람들을 설레게 하나. 하물며 1873년 이 소설이 발표되었을 때, 제국의 사람들은 어떠했겠는가. 그들은 공간을 시간으로 환원시킬 수 있는 과학을 갖게 되었고, 그들은 이를 역사의 무게로 만들어갔다.
필자는 존스홉킨스대에서 ‘우리 나라 의료보험제도의 역사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아시아 의학의 전통과 근대’ 등 일국사를 넘어서는 한국의학사 저술을 펴냈으며, 최근 1년간 연구년을 얻어 하버드대에 다녀왔다. |
출처:교수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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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공동집필 역사교과서 부교재 5월 출간
[세계일보 2005-03-03 19:24]
2002년부터 한국과 중국 일본 3국이 4년여에 걸친 작업 끝에 공동 집필한 역사교과서 부교재 목차가 공개됐다. 또 부교재 발간일도 오는 5월 18일로 최종 확정됐다.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일본교과서바로잡기운동본부)’는 3일 “지난달 말 부교재 ‘미래를 여는 역사’ 원고가 번역 및 완고됐다”며 “4월 말까지 최종 교정을 거쳐 5월 18일 발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번 부교재는 2001년 4월 일본 극우단체인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 만든 출판사인 후소샤(扶爽社)에서 발행된 왜곡 역사 교과서가 파문을 일으키자 한중일 역사·교육·시민사회 단체가 연대해 공동으로 만들었다. 특히 올해는 4년마다 돌아오는 일본 교과서 검정의 해로, 이번 교과서 검정위원회에도 새역모가 만든 왜곡 교과서가 제출됐다.
부교재는 서장(序章) 개항 이전의 3국을 포함해 본문 ▲개항과 근대화 ▲일본 제국주의의 확장과 한중 양국의 저항 ▲침략전쟁과 민중의 피해 ▲2차대전 후의 동아시아 ▲동아시아의 미래를 위해서 등 모두 6장으로 구성, 개항 이전부터 최근의 역사교과서·야스쿠니신사 문제 등을 연대기 순으로 담았다.
특히 당시 일본의 세력 확장을 ‘제국주의’와 ‘침략전쟁’으로 규정, 철저히 가해자 일본과 피해자 한국·중국의 입장에서 서술됐다. 각 장을 구성하는 주제는 3국이 공동으로 결정하고, 집필은 각국이 주제별로 분담했지만 검토 과정에서 3국이 충분한 토론과 수정을 거쳐 기술됐다.
부교재 각 장은 해당 시기의 역사적 인물을 부각했는데, 한국측 인물은 갑신정변 당시 개화파인 김옥균과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던 안중근, 역사학자 신채호, 여성해방운동가 정종명, 한국 최초의 페미니스트 나혜석, 위안부 피해를 고발한 강덕경 할머니 등이 포함됐다.
서로에게 적대적 행위를 했던 인물은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지만,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수록됐다. 부교재 속에서 안중근은 우리에겐 ‘의사(義士)’로 알려져 있지만 일본에서는 ‘테러리스트’로, 이토는 우리에겐 ‘침략의 수괴’지만 일본인들에게는 화폐 도안에 들어간 ‘근대화의 아버지’로 평가되고 있다.
2장에선 한중일 근대사가 투쟁사 중심으로 갈 수밖에 없어 자칫 남성 중심으로 흐를 수 있는 역사관을 바로잡기 위해 3국의 여성운동가들도 담았다. 부교재는 모두 300여쪽 분량으로 제작되며, 각 장 소절은 2쪽으로 구성해 학생들이 해당 내용을 짧은 시간에 알 수 있도록 했다.
신주백 운동본부 운영위원은 “지금까지 역사교과서 서술의 주체는 한 나라 단위를 넘어서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면서 “이번 부교재는 같은 사건과 현상에 대한 다름과 차이의 역사를 보여주면서 대립이나 분리가 아니라 공존의 가능성을 제시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 나기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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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 역사 교과서, 한국서는 '찬밥'
[노컷뉴스 2005-03-12 14:16]
일본의 역사 왜곡을 막기 위해 한중일 시민단체와 학계가 공동 집필한 역사교과서가 출판을 앞두고 있지만, 일본에서보다 오히려 국내의 반응이 더 냉담하기만 하다. 일본 후소샤의 교과서 왜곡 파문으로 한중일 3국의 양심적인 학자들이 함께 역사 교과서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지난 2002년.
40여 명의 한중일 학자들이 10여 차례의 토론을 거쳐 만든 공동의 역사 교과서가 오는 5월 한국과 중국, 일본에서 동시에 출판된다. 한중일 공동의 역사교과서는 일국의 편향된 관점을 넘어 동북아의 평화공존을 지향하며 근현대사를 기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3개국 공동 역사교과서가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국내에서 공동 교과서 제작을 주도한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 양미강 상임위원장은 "아직까지 한국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느 학교라든가 어디서 쓰겠다든가라는 것은 얘기된 건 없는 실정"이라고 밝혔다.
오히려 공동 역사 교과서에 큰 관심을 보이는 곳은 역사 왜곡 파문의 진원지인 일본. 이미 지난 1월 현재 6백여 권이 미리 예매를 마쳤고 역사 과목 부교재로 채택하겠다는 일선 학교에도 수백 권이 보급될 예정이다.
국내에서는 교과서가 출판된 이후 일선 학교 등을 상대로 본격적인 홍보활동을 펼친다는 방침이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호응이 없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양 위원장은“공동 부교재가 갖고 있는 의미만큼 학교 현장에서 아이들이 배울 수 있도록, 학교가 적극 채택해 줬으면 좋겠는데 한국은 아직 관심이 부족해 아쉽다"고 말했다.
동북아 3국이 역사에 대한 인식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모처럼 마련된 이번 기회가 자칫 우리의 무관심 속에 수포로 돌아가지나 않을까 우려스럽기만하다./ CBS사회부 김정훈기자
(대한민국 중심언론 CBS 뉴스FM98.1 / 음악FM93.9 / TV CH 162)
<ⓒ CBS 노컷뉴스 www.nocut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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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한중일 공동역사교과서 집필 김성보 교수
[한국일보 2004-08-17 19:15]
충북대 인문대학 교수연구실 357호는 방학인 요즘에도 밤 늦게까지 불이훤하다. 사학과 김성보(42) 교수가 한ㆍ중ㆍ일 학자가 함께 쓰는 역사교과서를 집필하고 있기 때문이다.김 교수가 이 작업을 시작한 것은 2001년 일본 우익단체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일제의 만행을 부인하는 등 역사를 왜곡하는 역사교과서를 내놓으면서부터. 이를 계기로 그는 ‘일본 교과서 바로잡기 운동본부’에 참여한다. 이후 운동본부와 일본의 양심적인 학자들은 서로 연락해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로 하고 여기에 중국 학자들도 참여했다.그 결실이 2002년 중국 난징에서 열린 ‘역사인식과 동아시아 평화 포럼’. 이 포럼에서 학자들은 3국이 인식을 공유하는 부분을 중심으로 19세기중반 이후 현대까지 근현대사를 300페이지 분량으로 담은 중학생용 교과서를 만들기로 했다. 각 국에서 2명씩 대표로 집필하되 메이지 유신에 대해서는 일본 측이 기초하고 30여 명의 각국 위원이 검증하는 식으로 분담했다. 한국 측에서는 김 교수와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가 집필을 맡았다.
“가칭 ‘3국이 함께 읽는 동아시아 근현대사’는 내년 5월 각국 언어로출간됩니다. 학교에서 부교재로 많이 쓸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문제로 분위기가 좀 복잡한 게 사실입니다. 지난 주 안양에서공동 집필 모임을 가졌는데 중국 측은 충돌을 피하기 위해 극도로 발언을자제했습니다. 그 분들은 ‘현재 동북공정이 진행 중이고 고구려 문제는그 중에서 작은 부분이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는 초보 단계의 학술 문제에 대해 한국이 문제 제기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다만 그 정서는 이해한다’는 식으로 얘기하더군요.”그 동안 의견차로 우여곡절이 많았다. 국호를 한국으로 할 것인지 조선으로 할 것인지, 한국전쟁 부분을 넣을 것인지 말 것인지 등은 아직도 토론중이다.
우리 측은 이 교과서가 나오고 나면 고대사 부분으로 작업을 확대하려고한다. 하지만 일본과 중국 측이 꺼리는데다 특히 중국은 정부기관인 사회과학원 소속 학자들이 참여했기 때문에 쉽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김교수는 “충돌과 토론 자체가 동북아 공동체의 평화로 가는 단초가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중국 일본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3국 모두 자기 자신의 역사만을 공부했다는 걸 느꼈습니다. 교류를 등한시하면 상호 이해를 해칩니다. 특히 각국청소년들만큼은 주체적이면서도 개방적인 역사인식을 함께 가져야 합니다. 공통의 역사인식이 마련되지 않으면 민족주의적 편향이 고조되고 갈등과마찰을 피할 수 없습니다. 고구려사 왜곡 문제도 적극적인 교류와 합리적인 토론 속에서 가닥을 잡아나가야 할 것입니다.”/ 박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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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한단고기,규원사화, 단재 신채호상고사, 삼일신고 풀이 천부경 풀이, 삼국 사기, 삼국 유사.등등은 보드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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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릭 역사의 문제점들은 보드자료에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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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가 펴낸 <대한민국사>를 권범철 작가가 만화로 풀어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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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은 1년여의 제작 과정을 거쳐 한국어의 탄생과 발달 과정을 조명한 '위대한 여정, 한국어'를 3부작으로 준비하여 9, 10, 17일 저녁 8시에 방송한다.
'한국어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어떻게 해서 오늘 우리에게까지 왔을까?'란 화두를 가지고, 시베리아의 바이칼에서, 인도양 너머 드라비다에서 한국어와 한국인, 그 문명과 역사의 길을 찾는다. 20만 년 전의 우연한 돌연변이, 언어유전자 FOXP2의 탄생. 그것이 인간과 원숭이의 운명의 갈림이었는데 언어학에서 유전학까지, 고고학에서 인류학까지 한국어의 기원을 추적하는 방대한 시공의 지식 대모험을 시작한다고 제작진은 말한다.
언어의 탄생과 민족의 생성, 민족의 소멸과 언어의 종말 등 무엇이 우리를 우리 민족이게 하는지를 생각해본다. '고구려, 백제, 신라어 그리고 일본어 그들은 서로 통했을까?'하는 물음에도 접근해보는데 마침내 드러난 대륙한어와 열도한어의 존재. 그 충격의 비밀이 밝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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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 아르항가이의 언어바위 / KBS |
ⓒ2004 KBS |
한국어를 처음 알타이어족에 포함시킨 것은 핀란드의 언어학자 람스테트였는데 어떻게 한국어를 알타이어족의 한 분파로 규정했을까, 또 그는 어떻게 한국어를 접하고 연구하게 되었을까? 핀란드 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된 람스테드의 친필 한국어 자료들을 최초로 공개하고, 그의 손녀와 학자들을 만나 최초의 한국어계통연구자로서 그의 업적을 알아본다.
또 한국알타이어학회 회원들과 함께 몽골과 시베리아의 두메에서 한국어의 기원을 찾아보고, 유라시아 대륙 25개국 출신 외국인들을 모아 언어 유사성 조사인 '언어 그루핑 실험'을 해본다. '우연한 발견한 언어유전자 FOXP2, 인류이동의 블랙박스 - 세석기가 말하는 한민족의 원형, 북방계 사람들이 당뇨병에 강하다? - 당뇨병이 말해주는 한민족의 기원, 신화가 말해주는 한국어의 또 다른 루트 - 쌀과 함께 남쪽으로부터?' 등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제2부 '말은 민족을 낳고'에서는 2300여 년 전 일본 열도에서 일어난 극적인 '야요이인의 열도대습격'을 이야기한다.
기존의 죠몽인들과는 인종적으로 완전히 다른 새로운 인종이 갑자기 출현하여 쌀과 청동기라는 무기를 가지고 열도를 점령해 나갔는데 그들의 출발지는 바로 한반도, 그들의 문화는 한반도의 청동기 농경문화, 그리고 그들의 언어는 바로 한반도어라는 것을 증명한다.
이어서 '일본어의 원류는 2300년 전의 한국어, 북서 20°의 비밀 - 거기에는 과연 무엇이 있었을까?, 미스테리! 일본어 속의 고구려어, 재미있는 언어실험 - KBS의 아나운서들은 130년전의 한국어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나?, 말의 종말, 민족의 소멸 - 만주어의 비극' 등을 펼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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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오로첸족 언어조사 / KBS | |
ⓒ2004 KBS |
일본의 외진 시골 대마도에서 풍물패를 조직한 당찬 여고생 아이짱은 지금 한국어에 도전하고 있다. 그녀의 꿈은 한국의 대학에 진학하여 한국문화와 한국어를 익히는 것인데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한국과 한국어를 선택하게 하였을까? 아이짱과 같이 한국과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한국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통해 한국어의 가능성을 묻는다.
세계에는 6천이 넘는 언어가 존재하지만 세계를 지배하는 언어는 오직 하나, 영어이고, 한국어는 사용인구 기준으로 12위권의 언어.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언어가 사멸해 가고 있으며, 세계는 지금 언어 전쟁중이다. 자신의 언어영역을 지켜내고 나아가 자신의 언어영역을 확장시키는 현장을 통해 묻는다. 한국어의 선택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더불어 '21세기 신산업 - 언어산업'을 이야기하고, '한국어의 선택 - 한국어의 세계화는 가능한가?'를 진단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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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식민지 근대화론'의 문제점
식민지사는 '정치사' 규명이 핵심
2004년 09월 29일 이노형/울산대 국문학
대한제국이나 식민지사에 대한 논쟁을 접하면서 근본적인 의문을 가져 본다. 그것은 역사관이다. 이와 관련해 그간의 논란을 정리한 박섭 교수의 견해에 따라 먼저 논쟁의 요점을 제시해 본다. 논쟁의 근본적 내용은 곧 식민지 일반에서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제국주의 지배구조가 근대화에 기여한 부분이 있는가 아니면 전혀 없는가에 대한 것이다. 논리적 면에서 전자는 일제의 조선점령은 근대화에 기여한 것이 되며 후자는 그것은 경제적 근대화에 기여했을지라도 본질적으로 수탈사일 따름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두 견해 모두 식민지근대화론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서로 일치하는 견해다. 하지만 식민지근대화론의 내부 차원에서는 서로 차이점을 지닌다. 상대적 차원에서 각각을 명명해볼 수 있다면 이른바 전자는 식민지발전론이요 후자는 식민지수탈론이라 할 수 있다.
식민지발전론이 지닌 허점, 곧 근대적 생산력만 주목했을 뿐 식민지적 생산관계인 수탈관계를 주목하지 않은 오류에 대한 비판은 이미 식민지수탈론에서 줄곧 제기했던 것이다. 여기서는 결정적 오류를 지닌 발전론이 아닌 수탈론이 지닌 문제점을 말해보자.
식민지역사를 수탈사로 이해할 경우 가장 어려운 문제점은 민족독립운동, 곧 근대적 정치운동의 의미를 평가해주더라도 이차적 수준의 평가에 그칠 수 있다는 점이다. 역사 규정에서 정치운동의 평가를 소홀히 할 경우 식민지사는 수동적인 역사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왜냐. 정치주권은 말할 것도 없고 경제주권이나 교육문화주권도 수동적인 수탈대상으로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도 그러하다.
그러나 민족선열들은 그 내부적 편차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민족 근대화의 선차적 전제는 민족독립 곧 정치주권의 회복임을 선명하게 인식했고 실천했다. 그러한 인식과 실천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참으로 적극적이고 격동적인 것이었다.
3.1운동, 6.10 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사회주의계열의 항일무장투쟁의 성격의 치열성과 정치성은 상식적인 사실이다. 30년대 이후 농민운동과 노동운동도 단순한 생존권투쟁만이 아닌 민족해방을 지향한 정치투쟁이었다. 그들 민족해방투쟁사에서 내건 본질적 목표는 무엇보다도 민족의 정치주권 회복임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식민지역사 규정의 결정적 기준은 경제나 문화가 아니라 정치영역의 정치투쟁에서 찾아져야 한다. 경제나 문화 영역의 투쟁도 정치투쟁일 경우 그 일차적 의미는 경제적 문화적 것이 아니라 정치주권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투쟁으로 이해돼야 한다. 식민지역사에서 이렇듯 진정한 근대화를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있었음에도 그를 소홀히 할 경우 민족사와 민중사는 극단적으로는 노예사로 이해될 가능성이 있다. 또한 근대화에서 우리는 수동적인 대상이며 일본 제국주의는 적극적 주역이라는 이상한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이것이 ‘성장’의 함정이다.
다만 정치적 민족해방의 결정적 힘의 소재가 민족선열인가 핵폭탄인가, 아니면 그 둘인가 하는 등의 구체적인 논란은 남을 것이다. 만일 힘의 주인공이 히로시마일 경우에는 수탈론의 견해는 여전히 설득력을 지닐 수 있다. 하지만 전자일 경우 수탈론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사관일 수가 있다. 식민지근대화론은 정치영역, 특히 정치투쟁사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소홀히 다루고 있다는 데에서 식민지사 해명에 이런저런 수준의 난점을 지닌 사관일 수 있다. 중세화, 근대화, 현대화의 어느 쪽이든 역사발전의 본질을 경제에 둘 경우 그 근본적 추동력이나 진정한 의미를 선명하게 드러낼 수 없다.
©2004 Kyosu.net
Updated: 2004-09-29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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