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에 해당되는 글 7건
- 2007.07.30 :: 항일투사 김남극
- 2006.07.05 :: Friedrich Karl Waechter 3
- 2005.08.08 :: 강수, 그에게 필이 꽂히다
- 2005.08.04 :: 산홍을 보셨나요 4
- 2005.02.07 :: 한국최초의 여류비행사 박경원
- 2005.01.15 :: 웃음을 판 ‘예인들의 삶’ 한눈에
- 2004.07.31 :: Gyges
누가 독립투사의 비문에 거짓 글발을 날렸나
중국 훈춘시 영안향 대황구촌에 가면 독립투사 김남극의 묘지를 만날 수 있다. 깨끗하게 정돈된 그의 묘비 기단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다. ‘대한민국 대통령 노태우, 국무총리 정원식 1999년 10월 17일 세움.’ 지나치게 뜬금 없는 비문이다. 1999년에 대통령 노태우라니. 이 비석과 인연이 깊은 연변대학 최용린 교수를 통해 비문에 얽힌 일화를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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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삼국통일에 김유신 장군이 무력으로 공을 세웠다면, 강수 선생은 문장으로 통일을 뒷받침한 분이었다.
통일신라 최초의 대 유학자이며 대문장가인 강수 선생은 본래 집안이 임나 가야 출신이지만 가야의 멸망과 더불어 신라의 사민정책(徙民政策)으로 중원경(지금의 충주), 사량(지금의 어디인지 알 수 없음)으로 옮겨와 살게 되었다.
아버지는 내마(17간등중 11관등)의 벼슬을 지낸 분이시며 선생의 본이름은 "자두(字頭)라 한다.
이는 선생의 어머니가 태몽에 뿔이 돋친 사람을 보고 임신하여 낳은 아들이 머리 뒤에 높은 뼈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 듯 하다고 한다.
머리에 돌출한 뼈를 이상히 여긴 아버지는 당시의 현자를 찾아가서 물으니 현자가 대답하기를 "복희씨는 범의 형상이요, 여와씨(복희씨의 누이)는 뱀의 몸이고,신농씨는 소의 머리요, 고도는 말의 입이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성현들은 그 상이 비슷하면서도 일반 사람들과 다른데 이 아이를 보니 머리에 검은 사마귀가 있으니 귀이하며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강수는 자라나면서 남다른 재능을 발휘하여 제 스스로 글을 읽고 그 뜻을 환히 통달하였다. 불교보다는 현세적이고 합리적인 유교를 숭상하였으며 도덕주의자였다. 그는 일찍이 부곡의 대장장이 딸과 사귀어 정을 통하고 있었다.
나이 20세 되는 해에 부모가 가문있는 집안의 규수를 들이고자 하니 강수는 거절하면서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바가 아니지만 도를 배우고 행하지 않는 것은 진실로 부끄러운 바입니다. 일찍이 옛사람의 말에 조강지처는 버리지 아니하고 가나할 때 사귄 친구는 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미천한 아내라고 해서 차마 버릴 수는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태종 무열왕 때, 당나라의 사신이 와서 조서(詔書)를 전하였는데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구절이 있었다. 왕이 강수를 불러 물으니 한번 보고 해석을 하는데 의심스럽거나 막히는 바가 없었다. 이에 왕은 놀라고 기뻐하면서 당의 조서에 대한 회사(回謝)를 강수에게 짓게 하였는데 문장이 훌륭하고 뜻이 충분히 나타나 있었다.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한 것은 무공이라 하지만
또한 문장의 도움이 있었으니...
삼국통일의 민족적 위업이 성취되어 가는 역사적 과정에서 강수의 학문적인 실력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확실한 근거는 없으나 문무왕 11년(671년)에 당나라 총관 설인귀가 보내온 글에 답하여 보낸 2,440여자의 대 문장은 강수의 작품이라고 한다.
문무왕 13년 왕은 다음과 같이 강수의 문장력에 대한 치적을 말하고 있다.
"강수의 문장서한으로 중국과 고구려, 백제에 나라의 뜻을 전하였기 때문에 우호관계를 맺는데 성공하였다. 우리 선왕(무열왕)이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한 것은 무공이라 하지만 또한 문장의 도움이 있었으니 어찌 강수의 공을 소홀히 생각할 수 있는가.""
강수의 사망연대는 정확한 자료가 없어 알 수 없으나 신문왕(681--692) 때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처: http://gochungju.co.kr/jboard/?p=detail&code=hero&id=33&page=1
강수 (强首)는 신라통일기의 유학자이며 문장가로서 활약하였는데, 지금의 충주인 중원소경(中原小京) 출신으로 부친은 내마(柰麻) 석체(昔諦)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삼국사기』 강수전에는 그가 효경(孝經), 곡례(曲禮), 이아(爾雅), 문선(文選) 등을 주로 공부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통일기인 태종무열왕과 문무왕 때 외교 문서를 작성하는 등 문장으로서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는 무열왕이 출신을 묻자, 자신은 본래 ‘임나가량인’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가 당시에 유행하던 불교를 택하지 않고 유학에 뜻을 둔 것은, 신라 말 최치원이 육두품이었다는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진골 중심의 골품제사회에서의 한계성에서 벗어나려는 육두품 이하 계층들의 학문적 경향 때문으로 보입니다.
신문왕 때 그가 죽자 왕은 후하게 장사를 지내주고 많은 물품을 하사하였으나 그 아내는 이를 받지 않고 향리로 돌아가 버렸다고 합니다. 강수의 아내는 신분이 낮은 부곡의 대장장이의 딸이었으나 그는 주위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버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신라가 신분제사회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의 윤리관은 새로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강수는 가야 출신이면서 육두품 이하의 신분으로 유학,문장학을 가지고 신라사회에 진출한 최초의 신흥유교관료의 성격을 가졌던 문인으로서 사회사상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출처: http://210.103.88.93/gaya/History/documents/whoson.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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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촉석루 벼랑에 많은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후세에 좋은 이름으로 길이 전해지길 바라면서 새겼을 것인데, 보는 이들은 눈살부터 지푸린다. 더욱이 일제 강점기에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섰던 그 이름들도 함께 있으니, 말 그대로 오욕의 현장이 되어 버렸다. 논개의 넋이 깃들인 곳에 한점 부끄럼을 남긴 것이 아닐까.
그 중 눈길을 끄는 이름도 있다. 山紅 이란 두 글자.
당시 지체높은 권문세가의 어르신들(?) 이름 곁에 한 획을 남긴 산홍은 누구였을까. 바로 당대를 풍미했던 진주 출신 기생 이름이다.
진주 출신 작곡가 이재호씨(1919-1960)는 노래로써 산홍을 애타게 찾기도 하였다.
산-홍아 너만-가-고 나는 혼자-버-리-기-냐
너---없는 내가-슴-은 눈오는 벌판이다
달없는 사막이-다 불 꺼진 항---구-다
이재호씨가 1940년 태평레코드사를 통해 발표한 ‘세세년년’이란 대중 가요의 일절이다. 가수 진방남이 구수하게 불렀을 이 노래 가사 중, 나를 혼자 버리고 무정하게 떠난 산홍이 도대체 누구길래 너없는 내 가슴은 눈오는 벌판이요, 달없는 사막이요, 불꺼진 항구라고까지 말하면서 애타게 찾고 있는 것일까.
예부터 ‘북평양 남진주’라고 불릴 만큼 진주 기생은 조선 8도에서 그 명성이 자자했다. 진주 기생들의 가무는 조선 제일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뛰어났으며, 정조가 두텁고 순박함으로 총애를 받아 왕실에서 베풀어지는 잔치에 불려나간 명기들이 많았다고 한다.
산홍은 황현의 매천야록에서 만날 수 있다. 매천야록 광무 10년(1906) 조에
“진주기생 山紅은 얼굴이 아름답고 서예도 잘하였다. 이때 이지용이 천금을 가지고 와서 첩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자. 산홍은 사양하기를, 세상사람들이 대감을 5적의 우두머리라고 하는데 첩이 비록 천한 기생이긴 하지만 사람 구실하고 있는데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이에 이지용이 크게 노하여 산홍을 때렸다.” 라는 기록이 있다.
글도 잘 쓰고 얼굴도 예쁜 진주 기생 산홍이 이지용의 첩이 되길 거부한 것은 당시로서는 큰 사건이었다.
이지용이 누구인가. 1905년 내무대신으로 을사조약에 적극 찬성하여 조인에 서명한 을사오적 중 한 사람이다. 1907년에는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으니, 그 권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대단하였다. 이런이지용이 천금을 가지고 와서 첩이 되어달라고 했는데 기생의 신분으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기에 충분했다. 이 일을 들은 어떤 사람이 이지용에게 시를 지어 주면서 희롱까지 하였다.
온 나라 사람이 다투어 매국노에게 달려가
노복과 여비처럼 굽신거림이 날로 분분하네
그대 집 금과 옥이 집보다 높이 쌓였어도
一點紅인 산홍은 사기가 어렵구나.
매국노에게 당당히 맞선 산홍은 당시 진주 기생의 기개를 만천하에 과시한 셈이 되었다. 이를 들은 매천 황현은 일개 기생의 기개이지만 세상에 소개한 것이다.
고종 말년에 나라에 경사가 자주 있어서 연회를 열 때마다 평양 등 전국 각지의 기생들을 불러 올렸다. 이때 올라온 기생들 중 일부는 지방으로 내려가지 않고 서울에 머물면서 영업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다 보니 같은 이름의 기생이 많아 분간하기 어려웠으므로 기생의 원적과 성명을 함께 부르는 풍속이 생겨났다.
예를 들어 평양 기생 이난향 대구기생 서향파 진주기생 김영월 해주기생 이벽선 등등으로 불렀다. 진주 기생 산홍도 당시 서울에서 이지용을 만난 것으로 보인다. 한 기록을 보면, “어떤 친일파 인사가 거금을 주고 당시 이름난 요정인 명월관의 진주기생 산홍을 소실로 삼으려하자.....”라고 하였다. 산홍은 명월관 기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산홍은 선배 기생 논개의 사당을 참배하고 시 한 수를 남겼다.
역사에 길이 남을 진주의 의로움
두 사당에 또 높은 다락 있네
일 없는 세상에 태어난 것이 부끄러워
피리와 북소리 따라 아무렇게 놀고있네
논개는 왜장을 안고 몸을 날려 천추에 꽃다운 이름을 남겼건만, 자신은 일없는 세상에 태어나 피리와 북소리 따라 아무렇게나 놀고 있음을 한탄하는 내용이다.
산홍의 시는 의기사에 들어서면 의기사 현판 왼쪽에 걸려 있다. 현판 오른쪽에 또 한편의 시가 걸려있는데 매천 황현의 작품이다. 1898년 매천이 진주를 방문하여 의기사에 참배하고 지은 시이다. 산홍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겨 세상에 알린 매천의 시가 산홍이의 시와 나란히 붙어 있는 것이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선비 매천 황현, 을사조약때 나라 팔아 먹은 매국노 이지용을 나무란 지조 높은 진주 기생 산홍의 시가 나란히 논개 사당에 걸려있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의기사를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관심하게 논개 영정만 보고 발길을 돌린다. [...]
http://kdo.gnnews.co.kr/technote/read.cgi?board=travel&y_number=10&nnew=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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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7월 30일, 그녀는 마침내 고등비행사 자격증을 땄다. 비행레이스에서 여성 입상자는 늘 그녀 혼자뿐이었다. 당시 조선인 여성으로서 비행대회에 출전하는 것은 기회조차 극히 제한되었지만, 그녀의 의지를 꺾을수는 없었다. 남자와 겨뤄 결코 뒤지지 않는 그녀를 보고 비행학교는 학교의 꽃이자 머리좋은 미인으로 칭찬했지만, 수석졸업을 한 그녀를 시기해 졸업장까지 찢는 남학생들의 횡포는 그칠 줄 몰랐다.
1930년, 열두명이었던 일본의 비행사 중 직접 비행을 하는 여류비행사는 그녀가 유일했다. 비행사의 꿈을 품은 지 13년, 비행학교에 들어간 지 9년만에 그녀는 오랜 숙원인 고국 비행을 하게 되었다. 1933년 8월 7일 오전 10시 34분, 그는 자신의 애기愛己인 청연靑燕을 타고 고국하늘을 향했다. 그러나 비행 50분만인 11시 25분, 아타미 상공을 가로지르던 청연은 폭풍우에 의해 하코네 산에 추락함으로써 인력으로 막지 못했던 그녀의 드라마 같은 서른세살의 삶은 마감되었다.
사람들은 비행긔를 터져서 죽는 두려운 물건으로 생각하오. 그러나 나는 긔여히 비행가로서 성공을 하야 남자에게 지지 않는 활동을 하겟소(1925년 7월 5일자 동아일보 인터뷰중에서)
- 최승영, 도베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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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관련 사진엽서 500여점이 우선 눈길을 끈다. 자료수집가 이돈수씨의 소장품이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엽서와 원판사진들로 당시 시대적 배경과 기생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쉬운 것은 일본인들이 제작한 것이어서 일제침략의 당위성 같은 것이 기생의 모습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1910년대 프랑스 선교사 문제만 신부가 사용한 엽서에는 아랫부분에 ‘경성(京城)의 기생과 여종’이라는 사진 설명이 영어와 일본어로 적혀있다. 여종을 데리고 국화꽃 앞에서 포즈를 취한 두루마기 차림의 기생은 이목구비가 또렷하며 총기 있어 보이는 계란형 얼굴의 미인이다. 기생의 서화작품으로는 평양 명기 소교여사(小橋女史)가 그린 묵죽도와 죽향(竹香)이 그린 묵란도가 나온다. 죽향은 당대 평양의 초일류 기생으로 꼽힌 인물이다. 묵죽의 대가인 자하(紫霞) 신위가 죽향의 ‘묵죽첩’에 제시를 쓰고, 추사(秋史) 김정희도 칠언시 두 수를 희증(희贈)했다는 것이다. 난이 그려진 기생의 치마폭도 처음 소개된다. 치마폭은 조선 후기 어느 선비가 아름다운 기녀를 위해 헌사한 것으로 보인다. 또 초상화가 권오창씨가 그려내는 기생 초상들도 볼거리다. 금은의 수식과 능라의 의복을 허용한 조선시대 기생의 의상이 이번 전시에서 재현된다. 19세기에 이르면 저고리가 극도로 짧아져 도련밑으로 가느다란 흰치마 허리가 보일 정도였고, 치마 엉덩이는 풍성하게 부풀린 것이 유행이었다. 한복연구가 김혜순씨가 전통복식연구가 유희경씨의 고증을 통해 장옷에서 젖가리개, 속속곳까지 제작, 전시한다. 성행위를 묘사한 동경(거울)을 비롯해 노리개·비녀·뒤꽂이 등 장신구와 신라 토기부터 조선 청화백자까지 여성 화장구의 변천사도 함께 보여준다. 기생의 이미지를 현대미술의 소재로 포착한 시도도 흥미롭다. 사진작가 배준성씨의 작품은 사진과 회화의 결합을 시도했다. 기생방에서 촬영한 알몸의 여성 사진 위에 김혜순씨 기생한복을 그려넣은 작품의 이름은 ‘화가의 옷-기생Ⅰ’이다. 그러니까 비닐로 된 옷을 들추면 누드가 드러난다. 또 윤석남씨는 조선기생 이매창과 황진이를 여성선각자의 이미지로 상징화한 설치조각 작품을 보여준다. 전시기획자 김효선씨는 “기생이란 존재를 시각적으로 구체화시켜보는 것은 피상적일 수 있다. 그러나 지적 능력과 예술적 능력, 진선미의 덕목을 추구하며 수 백년 간 존재했던 한국의 아름다운 이미지로 조명해보려 했다”고 말했다. (02)395-0331 〈이용 미술전문기자 lyon@kyunghyang.com〉
기생. 비록 술자리에서 웃음을 파는 직업이지만 상류층 남성들을 상대하느라 높은 수준의 지식과 재능을 가졌던 예인들이다. 춤과 노래·악기·시서화·학식뿐 아니라 지조·의기까지 갖춘 이들도 많았다. 특히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복식은 일반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을 만큼 ‘패션리더’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기생조합을 거치면서 기생은 성과 관련된 이미지만으로 왜곡·폄훼돼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한 실정이다. (주)서울옥션이 13일부터 한 달 간 서울 평창동 서울옥션센터 전시장에서 여는 ‘기생전’은 기생을 단독주제로 한 최초의 전시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사진엽서와 고미술품, 규방용품, 여성장신구, 고증 한복에 현대미술품과 영상까지 동원해 기생과 그 문화의 일면을 살필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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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나오는 기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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