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 남주자/aktuell 2005. 1. 12. 08:28

■ 환경운동의 발자취

인류의 진보와 발전에 대한 희망은 이제 개발과 공업화의 결과로 생겨난 자원 고갈, 환경오염, 에너지 위기 등으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로 변하였다. 1992년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열린 유엔환경개발회의는 이러한 인류의 장래에 대한 위기 의식에 근거하고 있다.
일본의 유기수은 중독에 의한 미나마타병 발생, 인도 보팔의 화학 공장 폭발, 구소련의 체르노빌 핵발전소 폭발은 공업 문명, 다국적기업, 비민주적 국가가 저지른 20세기의 3대 환경 재난이다. 이러한 환경 재난에 대해 사람들은 문제를 제기하고 몸으로 저항하며, 또 다양한 방식을 동원하여 이를 고발하였다.
레이첼 카슨(1907-64)은 화학물질 남용에 의한 생태계 파괴 위험을 경고한 미국의 해양생물학자이다. 카슨의 경고는 미국의 환경 운동 방향을 전환시켰다. 또 미국 환경 정책에 변화를 가져왔다. 그녀의 저서 『침묵의 봄(Silent Spring)』은 1962년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당시 케네디 대통령이 과학자문위원회를 소집하여 농약의 피해를 조사케 하였으며, 농약 가운데 상당 부분의 제조와 판매를 금지시켰을 정도로 『침묵의 봄』의 위력은 대단했다.
『침묵의 봄』 이전의 미국 환경운동은 자연생태계 보전이 중심을 이루었다. 존 뮤어는 1868년에 요세미티 계곡의 자연에 감동한 나머지 거기에 머물면서 자연환경보전운동을 하였다. 이러한 초기 환경운동가들의 노력에 의해 미국의 국립공원법이 제정되고 전국적으로 환경운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미국 정부는 또 산림관리국을 창설하여 자연보호를 행정적으로 뒷받침하였다. 지금 50만 이상의 회원을 가진 시에라클럽, 오듀번협회 등은 모두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조직된 환경 단체들이다. 1930년대에는 미국은 경제 위기 가운데서도 자연 개발과 동시에 홍수 방지나 토양 보전과 같은 환경 문제의 해결을 위해 자연보호 운동을 전개하였다.
카슨의 『침묵의 봄』 이후 미국 환경운동은 자연생태계 보전에 머물지 않고 인간이 만들어낸 독성 물질에 의한 피해로 관심이 옮겨져 갔다. 그리고 1970년 4월21일 제1회 '지구의 날'을 계기로 미국의 환경운동은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확산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참가한 지구의 날 행사에는 약 2000만 명이 참가하였다고 한다. 미국 정부에서도 이러한 시민들의 환경운동을 배경으로 환경보호청을 신설하고 환경 심의 기관을 연방정부에 설치하였다. 또 미국정부는 환경 영향평가법을 제정하였다. 이 시기에 지방의 풀뿌리운동은 크게 활성화되었다. 러브운하 지역에서는 폐기물 불법매립으로 다이옥신 오염이 발생하여 그것에 대한 반대운동이 벌어졌다. 각 지역마다 쓰레기 매립장, 소각장 등 혐오 시설의 건설을 반대하는 운동이 다수 발생한 것도 이 시점이었다.
미국의 환경운동은 1980년대 반환경주의적인 레이건 정부 하에서 다시 힘을 얻기 시작하였다. 환경운동은 지역의 풀뿌리운동을 기반으로 전국적으로 전개되었고 국제적인 활동으로 확산되었다. 또 그 내용도 다양해졌다. 미국의 전국규모 환경단체들은 3000만 명이 훨씬 넘는 회원을 갖고 있다. 이 단체들의 연간 예산만 해도 2억 달러가 넘는다. 큰 환경단체만 보더라도 전미야생생물연맹 97만 명, 전미오듀번협회 60만 명, 시에라클럽 56만 명, 미국 그린피스 85만 명, 미국 세계자연보호기금 67만 명 등이다.
일본은 후발공업국의 하나로 급속한 근대화를 이루어온 나라이다. 짧은 기간의 급속한 공업화 결과로 일찍이 환경파괴가 큰 문제가 되었다. 메이지 시대에는 아시오 동광산에서 폐광 물질이 흘러나와 농촌 을 파괴시킨 사건이 있었다. 오사카, 가와사키 등 공업 지역에서는 대기오염에 의한 피해가 속출하였다. 미나마타 유기수은 중독에 의한 인명 피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최대 공해문제이다. 통칭 미나마타병이라고 불리는 유기수은 중독은 구마모토현 미나마타시에 위치하고 있는 일본질소공업에서 나온 폐액이 물고기에 축적되고 유기화하며 다시 인체에 피해를 끼친 병이다. 1,0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이 사건의 전모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일본의 공업화가 가져온 환경 피해 사건으로서 최대의 그리고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다. 미나마타병은 1950년대 초 고양이가 사라져가는 징후를 사람들이 알기 시작하면서 사람들도 오염돼 가고 있다는 예감을 갖게 되었다. 1952년 최초로 인체에 병상이 나타난 후 미나마타병의 원인이 유기 수은에 의한 중독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은 59년, 이것을 정부가 인정한 것은 1968년이었다.
미나마타병이 발견되고 또 사회적으로 문제가 확산되는 데는 의사, 변호사, 교수 등 전문가들의 지원 운동이 큰 힘이 되었다. 일본의 반공해 환경운동은 지역주민들의 생존권 투쟁으로 시작되어 외부에서 지식인과 운동가들이 가담하는, 이른바 피해자 중심 운동인 점이 그 특징을 이룬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에 걸쳐 일본은 미나마타뿐만 아니라 요카이치시, 가와사키시의 대기오염에 의한 천식환자 대량발생, 니가타시 수은 중독(미나마타병), 이타이이타이병 발생 등 공해에 의한 피해가 대량 발생하였고 전국적으로 반공해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운동을 배경으로 도쿄, 오사카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사회당 공산당 등 혁신 정당이 중심이 되는 자방 자치 단체가 등장하여 지자체 수준에서 환경 문제의 획기적인 개선이 이루어졌다. 일본은 공해 대책을 지렛대로 산업 구조를 고도화하고 정보화, 전자화한 나라이다. 주민 운동의 저항, 좁은 국토와 인구 과밀, 자원 부족이라는 조건 속에서 정보화, 첨단 산업화, 서비스 경제화를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주도한 것은 공업화의 피해자를 중심으로 하는 반공해 주민 운동이었으며 또 이것을 뒷받침한 지방자치단체. 시민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환경운동은 1990년대에 비로소 시작되었다. 1980년대의 환경운동은 민주화운동의 일부였으며 그것이 한국 환경운동의 특징을 이루는 부분이기도 하다. 미국의 환경운동은 자연보호운동에서 출발, 생태계와 자연 환경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으며 일본은 피해자 중심의 환경운동을 전개해왔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유럽의 환경운동은 각급 의회를 중심으로 정치적 움직임을 통해 환경문제 개선에 노력하고 있다. 반면 우리는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서 환경문제가 정치적 민주화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하였다. 따라서 선진 여러 나라에서 전개하고 있는 환경운동의 역사는 우리에게 고유의 환경운동 전통을 바탕으로 생태 자연 환경에 대한 더 많은 관심, 정치적 참가의 중요성, 그리고 피해자에 대한 보다 많은 관심과 배려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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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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