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ext 2004. 9. 12. 11:51
[짧은 이바구] 발행월 : 96년 03월

왕숙천 소년과 다섯 마리의 백로


서울 주변에는 수많은 개천이 있다. 그 물로 농사를 짓는다. 비가 오면 도시에서 투망을 가지고 심심치 않게 농촌도시인들이 몰려온다. 농촌도시인은 당대에 농촌에서 살다가 도시로 가서 사는 사람들이다.

논이 그립고 산이 그리워 개울가를 찾는 사람들이다. 자연보호 차원에서 개울에 있는 고기를 잡는 것을 시비하는 세상이 되었지만 아직은 농촌 도시인의 아름다운 삶의 풍속이다.

경기도 퇴계원 옆을 지나는 왕숙천이 있다. 50대인 우리네가 중학교 다닐 적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미역감던 곳이다. 지금은 기름이 뜨고 오물 찌꺼기가 쌓여 악취가 난다. 이 곳에 비가 오면 농촌도시인들이 송사리를 잡으러 온다. 차라리 송사리가 살고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평소에는 송사리를 전혀 구경할 수 없다. 그러나 비가 오면 보인다. 평시에는 논 옆  어느 개굴창에서 피난살이하던 놈들이 제 세상 만났다고 왕숙천으로 나오는 것 같다. 비가 그치면 죽는 놈도 있을 것이며 논 옆 개굴창으로 다시 돌아가는 놈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스스로 추켜세우고 있다. 그러나 송사리의 고된 삶쯤 모른다.


며칠 전 백로 다섯 마리가 멋진 몸매와 날씬한 다리 그리고 우아한 날개짓을 하며 왕숙천을 찾아왔다. 백로는 철새이다. 왕숙천  철새의 낙원이다. 이제는 겨우 다섯 마리가 전부이다. 백로가 찾아온 것은 길조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루는 중학생 녀석이 백로에게 돌팔매짓을 해대고 있었다. 그것도 하루 온종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백로를 못살게 했다. 나는 그 소년에게 갔다.

“학생, 백로는 길조인데 왜 못살게 구는가?”

“아녜요 아저씨. 백로는 이런 더러운 물에서는 못 살아요. 쫓아버려야 더 좋은 물로 갈 거예요.”

나는 가슴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소년의 생각이 맞다고 느꼈기에 나도 돌을 들어 백로에게 겁을 주려 던졌다.

소년의 고향은 강원도 인제라고 했다. 그 곳은 아직 산수가 수려하다고 했다. 소년은 백로를 자기 고향으로 보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후 왕숙천 다섯 마리의 백로는 보이지 않았다. 소년만이 이 둑을 거닐며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았다. 비오는 날 농촌도시인들도 뜨문뜨문 했다.ꏮ

『아저씨 검은 풍선은 없나요?(이윤희 지음, 유레카)』에서 발췌


※이 글은 <우리교육> 1996년 3월 중등용에 실렸던 글입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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