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1년 이전에는 비행기와 글라이더를 개발하려는 시도가 가끔씩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오토 릴리엔탈은 그 모든 것을 바꾸었다. 그는 역사상 처음으로 지속적이고 반복이 가능한 비행을 할 수 있었다. 릴리엔탈이 비행하는 사진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그의 노력은 비행기를 개발하고자 하는 진지한 노력을 발목잡는 "체면의 장벽(respectability barrier)"를 깨뜨렸다. 왜냐하면 릴리엔탈 이전에는, 공기보다 무거운 항공기를 만든다는 것은 몽상가들나 바보들의 영역으로 널리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의 노력은 공기보다 무거운 항공기에 대한 능동적인 연구의 실험적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다. 릴리엔탈은 5년 동안 18가지의 다른 모양의 글라이더를 개발했다. 그의 노력은 세계적인 평판을 얻었으며, 그의 성공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의 발자국을 따르도록 용기를 주었다.
릴리엔탈의 글라이더 중 15개가 단엽기이고 3개가 복엽기이다. 각각의 모델은 능동적인 조종면을 사용했다기보다는 조종사 자신의 무게 중심을 움직여서 조종되는 행글라이더였다.
릴리엔탈의 첫번째 글라이더는 꼬리날개가 없었고 단지 한 쌍의 날개만이 있었다. 그는 보드에서 뛰어 내림으로써 이 글라이더를 시험하였다. 그러나, 릴리엔탈의 실험은 곧 더욱 진지해졌고 도전적이 되었다. 그는 Berlin 근처의 Lichterfelde에 인공적인 원뿔형태(뒤에서 보기에)의 언덕을 만들어서, 바람의 방향에 관계없이 글라이더를 띄울 정도였다.
모델번호11은 릴리엔탈의 표준모델로써, 13제곱미터의 날개넓이를 갖는 단엽기였다. 적어도 8개의 동일 모델의 복제품이 만들어져서 구매자들에게 팔리거나 선물로 주어졌다. 스미소니언에 있는 National Space and Air Museum은 릴리엔탈이 만든 모델번호11의 모델을 소장하고 있다.
릴리엔탈의 유산
릴리엔탈은 비행기의 발명에 두 가지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첫째로, 그는 글과 예를 통해 비행의 완성은 먼저 글라이더를 통해서 이루어져야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성공과 실패를 통해서 라이트 형제에게 특별한 영감을 제공하였다.
찰스 깁스-스미스 경은 비행기 개발자를 두 가지 부류로 구분했다. 그가 명명한 첫번째는 "하늘의 운전사(Chauffeurs of the Air)"인데 그 이유는 그들은 비행기를 조종하는 것을 차를 운전하는 것과 같이 여기기 때문이다. 두번?로 ,깁스-스미스는 공기 라는 매개체가 지면에 근거한 기동보다는 실제로 비행을 매우 다른 문제를 만든다는 것을 이해하는 "조종사(Airmen)"로 구분했다.
운전사는 양력 혹은 조종 같은 요소에 대한 고려없이 단지 충분한 추진을 얻는 것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으려는 경향이 있다. 조종사는 동력 비행에 관한 문제에 착수하기 전에 글라이더에 초점을 맞추어 접근한다. 릴리엔탈은 비록 글라이더를 처음 탄 사람은 아니지만 그의 체계적이고 조직화된 접근법, 그리고 그의 명백한 성공은 "조종사"로 구분된다.
라이트 형제가 남긴 말과 글에서 릴리엔탈이 그들의 노력에 대한 영감의 근원이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릴리엔탈의 글은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의 발명을 흥미있는 목표로 설정하도록 만들었다. 확실히 그들이 초기 "비행 문제"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것은 릴리엔탈의 생각과 어려움으로부터 유도된 것이었다.
릴리엔탈은 비행기 발명에 관한 두 가지의 유명한 인용을 남겼다.
"비행기를 발명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비행기를 만드는 것은 어느정도 무엇가를 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것은 모든 것이다." ( To invent an airplane is nothing. To build is sometjing. But to fly is everything.)
두번째는 너무나 예언적이다. "희생은 반드시 치러야한다.(Sacrifices must be made)" 그는 행글라이더 추락으로 이틀동안 누워있다가 1896년 8월 10일 사망했다.
출처: http://www.aric.or.kr/
* 첫 비행을 시도하고 3년 후에 세상을 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