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r eyes/literature
2004. 12. 16. 08:34
2004년 신춘문예 당선작에 관한 시평詩評(1)
2004년 신춘문예 당선작이 발표되었다. 중앙지는 물론이고 지방지까지 가세한 신춘문예를 보면서 새삼 언론의 힘이 문학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것이 스타탄생에 비길만큼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다고 볼 정도로 그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문학을 마치 신비한 영역처럼 극적인 연출이 되는 현실에서 신문사의 역활은 과연 모든 문학적 열망을 수용하고 선도해 나갈 수 있는 곳인가에 대해서는 현재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정적이다. 특히 언론이 좋은 작품이라는 판정을 내릴 수 있는 공적인 기관인가에 대해서 한번도 곱씹지 않는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신춘문예 예찬론자들의 입장을 감안하면 문언유착이라는 고리에 얽매인 우리 문단의 현실에 대한 반성은 아직도 거대 자본의 논리에 묻혀 미약할 수 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 등단이란 절차가 서양처럼 출판사를 통한 단행본 출판의 경향보다 문예지, 무크지, 동인지, 추천제와 신인상을 통해 등단하고 있는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일간지가 실시하는 신춘문예에 대한 집착은 기성문인은 물론이고 습작시인들의 의식 저변에 정식등단이라는 절차에 대하여 신춘문예가 우위를 점한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밝혀주는 좋은 예로 보면 된다. 기실 신문들이 신춘문예와 문학상을 통해 신인들을 발굴하고 육성, 홍보를 하는 영향력을 감안할 때 문학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을 가십화하고 작가를 대중스타류로 만들며 신문이 출판 상업주의의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다는 지적과 더불어 '문학의 소외'를 부추긴다는 문학평론가 김명인의 날카로운 지적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글을 쓰는 모든 습작 시인들에겐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등단의 기회로 또는 일부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기성시인들에게는 재등단이라는 기회로 삼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에 앞서 때에 따라서는 자신의 순수한 문학적 열망을 왜곡 될수도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되돌아 보아야할 시점도 되었다. 다시말해 신춘문예를 통한 등단이 곧 자신의 문학적 가치는 물론 상품적 가치를 높히는 공신력 높은 시스템으로 삼는 것 자체가 언론의 문학종속화를 심화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문예지 현상공모를 실시했던 1917년『청춘』이래 동인지, 그리고 신인추천의『조선문단』,1925년『동아일보』1928년『조선일보』의 신춘문예 실시 등은 모두 민족수난기였던 1920년대에 집중되어 있다. 이후 1945년 일제잔재의 청산이 언론에서는 미비했다는 사실과 오늘날 언론들이 보수적인 난맥상을 보인다는 점도 알 필요가 있다. 물론 언론이 새로운 신인들을 발굴하고 조명해줌으로써 문화예술의 진흥에 일조하는 것은 순기능의 측면이지만 과연 오늘날처럼 다양하게 등단할 수 있는 제도를 가진 현실에서 신춘문예는 그 역사 만큼이나 퇴락한 여러가지 역기능도 무시할 수 없는 처지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는 등단 문인 중 60~70%가 문예지를 통해 등단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특별한 지면이나 제도적인 밑받침이 없는 신춘문예 출신들이 지면을 확보하기 위해 문예지로 재등단하는 것과 문예지 출신들이 자신의 가치를 높히기 위해 신춘문예로 재등단하는 경향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실제로 문학적 성과가 드러나지 않거나 검증되지 못한 신인들은 쉽게 도태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앞서 신문이 특정인의 문학적 성과를 기사화해 부풀리고 다시 그 문학적 성과를 출판하여 상업적 이득을 창출하는 자본의 논리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또한 언론이 필요에 따라 자신들이 키워놓은 문학인을 통해 신문사의 특정 이슈를 문학인을 통해 나팔수로 나서게 하는 일은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다.
둘째는 신춘문예가 무슨 문학권력을 보증하는 듯한 태도의 문제일 것이다. 조선조 과거를 주재하는 관리가 그 등과자들을 자신의 개인적인 인맥(문하생)으로 만든 예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조선조에는 과거를 주재하는 관리가 되는 것을 아주 영광스럽게 생각하였으며, 아울러 자신이 주재한 과거장에서 등용되는 관리는 당연히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추종자들이 되기도 했다. 이는 조선조 병폐의 하나였던 파당의 문제와 맥락을 같이 한다. 이러한 부정적인 면은 일부 문학지에서 항상 제기되는 특정인맥 특정학교의 문학지라는 비판을 받는 현실과 다르지 않다.
셋째는 심사자들의 중복이다. 심사자들의 중복이 가져오는 병폐는 개인적으로 심각하게 보는 중이다. 이는 심사자들의 문학적 경향에 맞는 작품들이 양산되거나 표절시비를 낳는다는 점일 것이다. 특히 중앙 5대 일간지의 지난 10년간의 신춘 담당 심사자들이 거의 몇명에 의해 선작되었다는 사실은 심사관행에 대한 공정성 시비를 충분히 불러 일으킬 수도 있다. 이러한 심사자들의 중복이나 고정은 신문사가 가진 특정 이데올로기에 맞는 문인들을 뽑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다음의 자료는 지난 90년 이후 2002년도 까지의 자료이다.(일부는 2003년까지) 동아일보의 경우 신경림이 5회 김주연이 5회 김혜순이 4회 이남호가 3회이며, 조선일보의 경우 황동규가 12번 김주연이 10회로 조선일보의 문제가 가장 심각하다.(70~80년대는 박두진 조병화가 독점) 경향신문에서는 김종해가 5회 정현종 3회 신경림이 7회이며, 한국일보는 신경림이 9회 정현종이 3회 김남조 3회 황지우 3회 김광규 5회이다. 서울신문(2002년도까지)의 경우 김종길 4회 박성룡 5회 정현종 2회, 중앙일보(2002년도까지)의 경우 80년대를 같이 산출할 경우 황동규가 10회를 한 것으로 나온다. 또한 문화일보의 경우 김광규 4회 황동규 7회이며 세계일보의 경우(2002년도 까지) 유종호 5회 신경림 6회 김광규 4회 황동규 3회등 거의 신춘문예 심사자가 어떤 사람인지 쉽게 나온다. 그러면 다른 지방지의 경우도 이와 유사하다고 볼 경우 아마 상당한 심사자의 중복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봐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당대에 뽑힌 작품들이 거의 유사한 세계와 작법을 가진 것에 유의한 적이 있었다. 이는 심사자들의 중복과 관련해서 보면 선명하게 그 문제점이 보인다.
해마다 신춘문예를 시행하는 신문사의 입장이나 선자들이 내세우는 입장은 한결같이 실험적이고 혁신적인 시작과 차후 문단을 이끌어 갈 신인을 발굴한다는 취지를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신춘문예용 작품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정형화된 적품들이 선작되는 현실에서 과연 패기있고 실험적인 작품이 뽑히는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을 것이다. 특히 선자를 명망있는 원로급의 문인들을 초빙하여 선작하겠다는 의도는 문단의 위상으로 보아 충분히 공감이 되지만 과연 이 분들이 참신한 신인 발굴에 얼마나 기여하였는가는 의문이다. 이는 다른 문예지로 등단하는 작품에 비해 신춘문예에 선작된 작품들이 그렇게 뛰어난 작품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라는 점도 지적할만 하다. 환언하면 심사자들의 중복이나 고정은 결국 심사자의 문학적세계에 부합한 작품의 양산을 가져온다는 맹점이 생기는 것이며, 아울러 기성의 문학적 관습과 태도 그리고 세계를 그대로 답습하게 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신춘문예가 오히려 신인들의 패기와 혁신적인 문학적 열정을 죽이는 통제장치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기존 문단의 성향을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 신춘문예작이라고 본다면 신인의 실험성 돋보인 작품의 출현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다음은 5대 신문사가 선작한 작품들이다. 각 작품에 대한 심사평을 원용하면서 신춘문예가 의도하는대로 선작된 것인지 냉정하게 들여다 보자. 먼저 <조선일보>의 경우다.
<조선일보>는 70~80년대엔 박두진 .조병화가 90년대 이후는 황동규와 김주연이 독점적으로 심사하고 있다. 조선일보가 유독 심사위원의 고정성이 가져오는 병폐를 외면하고 있는 현실은 매우 심각한 것이다. 심사 위원의 고정은 문학의 다양한 역동성을 죽이는 행위로 이 두 문인의 시각에 적합하지 않으면 선작이 안된다는 뜻임은 어지간히 짐작이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신문사에서 특정 문인을 심사자로 고정시키는 이면에는 역시 신문사의 이해관계에 가장 맞는 부류라는 역반증이 가능한 것이다. 신문사가 특정한 문학세계를 가진 특정한 신인들을 뽑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폐(폐)타이어-김종현 <2004년 조선일보 당선작>
아파트 공터 한 귀퉁이
속도를 잊은 폐타이어
땅속에 반쯤 묻힌 깊은 침묵 속
햇빛을 둥글게 가두어 놓고
동그랗게 누워 있다
그가 그냥 바퀴였을 때는 단지
속도를 섬기는 한 마리 검은 노예일 뿐이었다
날마다 속도에 사육되고
길들어 갔다
다른 속도가 그를 앞질러 갈 때
그는 바르르 떨며
가속 결의를 다져야 했다
자주 바뀌는 공중의 표정 앞에서는
잽싸게 꼬리를 사려야 했다
검고 딱딱한 세계 위에서 세월을 소모하며
제한된 영역만 누려야 했다
지금 저 동그라미는 자신의 일생이
얼마나 속도에 짓눌려 왔는지 기억하고 있을까
튕겨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했으리라
예약된 모든 속도들 다 빠져나가고
속도는 한 줌 모래처럼 눈부신 한계였을 뿐
얼마나 어지러웠을까
속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속도에 매달린 세월
그가 속도의 덫에서 풀려나던 날
온몸이 닳도록 달려온 일생을 위로하듯
바람은 그의 몸을 부드럽게 핥아주었다
잠시 뒤의 어떤 바람은 풀씨랑 꽃씨를
데리고 와서 놀아주었다
벌레들의 따뜻한 집이 되었다
잃어버린 속도의 기억 한가운데
초록의 꿈들이 자란다
노란 달맞이꽃은 왕관처럼 환히 피어 있다
"당선작 폐타이어가 우리 현실의 핵심을 가로질러 가는 속도의 문제에 대하여 전통적 서정의 회복을 꿈꾸는 시적 자아가 문명의 구체성에 대한 관찰과 한편으로 그 피곤을 어루만지는 시의 힘, 그 부드러움을 탁월하게 대비시켰다" "언어의 조탁보다 오늘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야만스러워져 가는 시대의 중심을 꿰뚫어 바라보면서 시의 존엄을 새삼 이루어 나가려는 박력이 아닐까" -<심사평>황동규, 김주연
심사평에서 위의 시에 대해 밝힌 것은 문명의 피곤을 어루만지는 힘이 탁월하다는 선작의 논지다. 이를 다시 풀면 이 작품이 갖고 있는 문제의식이란 문명에 대한 문제의식(속도)을 폐타이어와 결부하여 보았을 때, 탁월한 것이었다는 설명이 된다.
그럼 소재의 문제에 주목해서 보자. 시작에 나타난 태도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대한 의식을 조장하고 방향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시인의 지각은 어떤 특정한 것과 유용한 것에 주목하기 마련이다. 모든 것들이 공감적이기 위해서는 복잡하고 세밀한 부분까지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필요하다. 폐타이어라는 소재를 통하여 현실의 깊은 구조적인 문제(문명의 야만성)를 드러낼 수 있다고 보는 것 이면에는 '폐타이어=야만의 문명비판' 이라는 도식이 쉽게 도출되는 소재주의에 결과로 밖에 볼 수 없다. 루이스 멈포드는 .『예술과 기술』에서 '기술의 인간화'의 필요성을 말한 적이 있다. 문명에 대한 상투적인 혐오나 기피증을 보이는 것은 오히려 현재의 자본 논리를 설명할 힘이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또한 선작평에서 "시대의 중심을 꿰뚫어 바라보면서 시의 존엄을 이루어 가려는 박력"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상투적인 평가일 뿐 아니라 과잉해석으로 보인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선작 경위를 검증해낼 수 있는 시평이 나오지 않을 경우 선작의 당위성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있을까하는 의문이 남는다. 특히 차선작이 공개되지 않는 통례에 따라 본다면 더더욱 의문이 생긴다. 아울러 지적할 문제로 시적 구조와 전개 그리고 세계관이 지난 97년 서울신문 당선작이었던 박남희의 『폐차장 근처』시와 유사한 면이 없지 않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이미 네티즌의 이름으로 표절시비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선작에 있어서 헛점이 많은가를 스스로 드러낸 결과로 보인다. 아울러 과연 심사자들이 지난 당선작들에 대한 검토가 먼저 이루어진 후에 선작된 것인지 상당히 의문스럽다. 다시 말하면 예, 본선에 참여한 심자자들의 안목이나 역량에 심히 의문스럽다는 말이다. 아니면 당선작이 뽑힌 충분한 논의를 공개하거나 차별성을 선작평에 냈어야 옳을 것이다. 이러한 시비들이 단지 명망있는 선자들이 뽑았다는 이유로 재논의 되지않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이미 2003년도 매일신문 당선작이었던 김옥숙의 『낙타』가 김충규의 『낙타』를 표절했다는 문제제기가 묵살된 적이 있었던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투명한 그리고 공정한 선작을 바라는 모든 문학도들의 관심과 시비에 적극적으로 응답해야 한다고 본다.
<참고자료>
폐차장 근처 -박남희<1997년 서울신문 당선작>
이곳에 있는 바퀴들은 이미 속도를 잃었다
나는 이곳에서 비로소 자유롭다
나를 속박하던 이름도 광택도
이곳에는 없다
졸리워도 눈감을 수 없었던 내 눈꺼풀
지금 내 눈꺼풀은
꿈꾸기 위해 있다
나는 비로소 지상의 화려한 불을 끄고
내 옆의 해바라기는
꿈 같은 지하의 불을 길어 올린다
비로소 자유로운 내 오장육부
내 육체 위에 풀들이 자란다
내 육체가 키우는 풀들은
내가 꿈꾸는 공기의 질량만큼 무성하다
풀들은 말이 없다
말 없음의 풀들 위에서
풀벌레들이 운다
풀벌레들은 울면서
내가 떠나온 도시의 소음과 무작정의 질주를
하나씩 지운다
이제 내 속의 공기는 자유롭다
그 공기 속의 내 꿈도 자유롭다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저 흙들처럼
죽음은 결국
또 다른 삶을 기약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곳에서 모처럼 맑은 햇살에게 인사한다
햇살은 나에게
세상의 어떤 무게도 짐 지우지 않고
바람은 내 속에
절망하지 않는 새로운 씨앗을 묻는다
두번째 작품 <문화일보 당선작>을 보자.
시월의 잠수함 - 김지훈<2004년 문화일보 당선작>
구름이 입술 위에 달라붙는
이 자리는 북한산 어디쯤일까. 지닌 것 없이
숲만 가득 담아둔 나무 그늘에 앉아
기어이 가져온 새 책에 손가락을 베고 말았다
혈이 탁 트이고서야 내 온몸이 잠망경으로 솟아오를 수 있었다
작은 물줄기 속에서도 잘 돌아가는 스크루
사방 가득한 수억 燭의 소리가 큰 닻이 되어
산봉우리들이 신들의 전함으로 불리었던 그 바다 위에 박혀 있다
밤낮이 한꺼번에 몰아오는 내연기관의 큰 울림
그 안에는 칼 대신 나뭇잎 들고 싸우던 날도 있다
힘줄 선명한 잎 하나가 공기를 잘게 저미며 내려온다
신들은 어디에서 배를 만드는 중일까
베어낸 나무 밑동에 그려진 선명한 음파탐지기 자국
나는 녹슨 쇠를 털며 가라앉고 있는 배들의 그림자를 본다
나뭇잎을 칼처럼 쥐고 싸우던 시절
앙상해진 주물기계들이 나뭇가지에 붙어 있다
바람이 떠미는 결이 물 속인 줄 알고
낙엽이 벗었다가 도로 신는 잠수화를 본다
아직도 능선에는 사나운 기운이 넘친다
신들의 칼을 나는 나뭇잎이라고 고쳐 부르고 싶다
이 배를 붙들며 한 자리에서 먼바다를 돌아오는 사계절
내 고함으로 한 방의 어뢰를 뭉쳐
사령관의 함교가 있는 백운대를 한 방 때릴 셈이다
갑판이 낙엽을 털 듯 몸을 털며 다시금 방향을 잡고 나아갈 때
수리공들이 큰배를 향해 떼지어 몰려가는 항로를 따라
푸른 위장을 한 잠수함이 쫓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본심 15명 중에서 다시 두 명, 그리고 한 명은 중복투고로 탈락됨으로써 김지훈의 '시월의 잠수함'이 선작되었다고 한다. 위 작품에 대한 선작평은 다음과 같다.
"당선작으로 결정한 김지훈의 '시월의 잠수함' 은 스케일이 크고 힘이 있는 작품이다. '구름이 입술 위에 달라붙는/ 이 자리는 북한산..으로 시작되는 이 시의 역동성은 현실과 상상, 내면과 외면, 하강과 상승 같은 쌍대(雙對)의 문법을 잘 활용하는 데서 온다고 말할 수 있다. '혈이 탁 트이고서야 내 온몸이 잠망경으로 솟아오를 수 있었다' '능선에는 사나운 기운이 넘친다', '백운대를 한 방 때릴 셈이다' 같은 시행에서 보듯이 호방한 기운도 느껴진다. 그러나 말의 느낌이 큰 시어들을 선택하고 장중한 이미지들을 배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노력이 계곡처럼 깊은 울림을 품은 한 편 시의 웅장함으로 형상화되지는 않은 듯했다."<심사평>-황동규, 최승호
당선작 김지훈의 '시월의 잠수함'은 선작평처럼 수사의 세련성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언술이 모호하고 관념적이어서 포괄적인 의미만 잡힐 뿐 선명한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따라서 현란한 수사만 두드러져 보인다. 시어자체는 역동성을 지녔는지 몰라도 전체적으로 보면 개인적이고 자의식에 절대적인 가치를 주는 메타포어의 난립으로 보인다. "큰 시어들을 선택하고 장중한 이미지들을 배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노력이 계곡처럼 깊은 울림을 품은 한 편 시의 웅장함으로 형상화되지는 않은 듯했다."라는 평가가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적 세련성에 더 많은 초점을 둔 것을 보면 신춘문예의 원취지인 실험적어서 투박하지만 새로운 세계를 지닌 신인 발굴이라는 취지를 저버린 것 같다. 근본적으로 새로운 작품이란 기억, 이미지, 지식, 경험, 인식 등이 한 사회의 열망과 포부를 암시해 내거나 표현, 구현해내는 작업이다. 당선작에서 느끼는 것은 역동적인 시어라기 보다 격앙된 어조이며 과잉 의미를 작품에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장중한 이미지라는 것도 서정이나 감상으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에 대한 깊고 넓은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자연의 현상과 힘을 인간의 역사와 운명, 인류의 문화와 문명과의 관계에서 거론하고 접근하여야 장중하다고 할 것이다. "신춘문예는 하나의 등용문(登龍門)이다. 용문을 오를 때에는 벼락이 치고 꼬리 그을린 큰 잉어가 용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 우리는 걸출한 신인의 출현을 보고 싶다." 라는 선작평에 비해 작품이 드러내는 세계는 탁월한 무엇(체험의 선택), 어떻게(조직과 형상화) 절실하게 드러냈는가라는 질문에 무엇하나 공감할 수 있는 꺼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할 수 밖에 없다. 롤랑바르트의 말처럼 "세련된 언어, 잘쓴 글이라는 표현은 비문학적인 진술이다" 라고 한 말을 다시 생각나게 한다.
2004년 신춘문예 당선작이 발표되었다. 중앙지는 물론이고 지방지까지 가세한 신춘문예를 보면서 새삼 언론의 힘이 문학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것이 스타탄생에 비길만큼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다고 볼 정도로 그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문학을 마치 신비한 영역처럼 극적인 연출이 되는 현실에서 신문사의 역활은 과연 모든 문학적 열망을 수용하고 선도해 나갈 수 있는 곳인가에 대해서는 현재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정적이다. 특히 언론이 좋은 작품이라는 판정을 내릴 수 있는 공적인 기관인가에 대해서 한번도 곱씹지 않는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신춘문예 예찬론자들의 입장을 감안하면 문언유착이라는 고리에 얽매인 우리 문단의 현실에 대한 반성은 아직도 거대 자본의 논리에 묻혀 미약할 수 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 등단이란 절차가 서양처럼 출판사를 통한 단행본 출판의 경향보다 문예지, 무크지, 동인지, 추천제와 신인상을 통해 등단하고 있는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일간지가 실시하는 신춘문예에 대한 집착은 기성문인은 물론이고 습작시인들의 의식 저변에 정식등단이라는 절차에 대하여 신춘문예가 우위를 점한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밝혀주는 좋은 예로 보면 된다. 기실 신문들이 신춘문예와 문학상을 통해 신인들을 발굴하고 육성, 홍보를 하는 영향력을 감안할 때 문학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을 가십화하고 작가를 대중스타류로 만들며 신문이 출판 상업주의의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다는 지적과 더불어 '문학의 소외'를 부추긴다는 문학평론가 김명인의 날카로운 지적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글을 쓰는 모든 습작 시인들에겐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등단의 기회로 또는 일부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기성시인들에게는 재등단이라는 기회로 삼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에 앞서 때에 따라서는 자신의 순수한 문학적 열망을 왜곡 될수도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되돌아 보아야할 시점도 되었다. 다시말해 신춘문예를 통한 등단이 곧 자신의 문학적 가치는 물론 상품적 가치를 높히는 공신력 높은 시스템으로 삼는 것 자체가 언론의 문학종속화를 심화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문예지 현상공모를 실시했던 1917년『청춘』이래 동인지, 그리고 신인추천의『조선문단』,1925년『동아일보』1928년『조선일보』의 신춘문예 실시 등은 모두 민족수난기였던 1920년대에 집중되어 있다. 이후 1945년 일제잔재의 청산이 언론에서는 미비했다는 사실과 오늘날 언론들이 보수적인 난맥상을 보인다는 점도 알 필요가 있다. 물론 언론이 새로운 신인들을 발굴하고 조명해줌으로써 문화예술의 진흥에 일조하는 것은 순기능의 측면이지만 과연 오늘날처럼 다양하게 등단할 수 있는 제도를 가진 현실에서 신춘문예는 그 역사 만큼이나 퇴락한 여러가지 역기능도 무시할 수 없는 처지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는 등단 문인 중 60~70%가 문예지를 통해 등단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특별한 지면이나 제도적인 밑받침이 없는 신춘문예 출신들이 지면을 확보하기 위해 문예지로 재등단하는 것과 문예지 출신들이 자신의 가치를 높히기 위해 신춘문예로 재등단하는 경향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실제로 문학적 성과가 드러나지 않거나 검증되지 못한 신인들은 쉽게 도태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앞서 신문이 특정인의 문학적 성과를 기사화해 부풀리고 다시 그 문학적 성과를 출판하여 상업적 이득을 창출하는 자본의 논리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또한 언론이 필요에 따라 자신들이 키워놓은 문학인을 통해 신문사의 특정 이슈를 문학인을 통해 나팔수로 나서게 하는 일은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다.
둘째는 신춘문예가 무슨 문학권력을 보증하는 듯한 태도의 문제일 것이다. 조선조 과거를 주재하는 관리가 그 등과자들을 자신의 개인적인 인맥(문하생)으로 만든 예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조선조에는 과거를 주재하는 관리가 되는 것을 아주 영광스럽게 생각하였으며, 아울러 자신이 주재한 과거장에서 등용되는 관리는 당연히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추종자들이 되기도 했다. 이는 조선조 병폐의 하나였던 파당의 문제와 맥락을 같이 한다. 이러한 부정적인 면은 일부 문학지에서 항상 제기되는 특정인맥 특정학교의 문학지라는 비판을 받는 현실과 다르지 않다.
셋째는 심사자들의 중복이다. 심사자들의 중복이 가져오는 병폐는 개인적으로 심각하게 보는 중이다. 이는 심사자들의 문학적 경향에 맞는 작품들이 양산되거나 표절시비를 낳는다는 점일 것이다. 특히 중앙 5대 일간지의 지난 10년간의 신춘 담당 심사자들이 거의 몇명에 의해 선작되었다는 사실은 심사관행에 대한 공정성 시비를 충분히 불러 일으킬 수도 있다. 이러한 심사자들의 중복이나 고정은 신문사가 가진 특정 이데올로기에 맞는 문인들을 뽑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다음의 자료는 지난 90년 이후 2002년도 까지의 자료이다.(일부는 2003년까지) 동아일보의 경우 신경림이 5회 김주연이 5회 김혜순이 4회 이남호가 3회이며, 조선일보의 경우 황동규가 12번 김주연이 10회로 조선일보의 문제가 가장 심각하다.(70~80년대는 박두진 조병화가 독점) 경향신문에서는 김종해가 5회 정현종 3회 신경림이 7회이며, 한국일보는 신경림이 9회 정현종이 3회 김남조 3회 황지우 3회 김광규 5회이다. 서울신문(2002년도까지)의 경우 김종길 4회 박성룡 5회 정현종 2회, 중앙일보(2002년도까지)의 경우 80년대를 같이 산출할 경우 황동규가 10회를 한 것으로 나온다. 또한 문화일보의 경우 김광규 4회 황동규 7회이며 세계일보의 경우(2002년도 까지) 유종호 5회 신경림 6회 김광규 4회 황동규 3회등 거의 신춘문예 심사자가 어떤 사람인지 쉽게 나온다. 그러면 다른 지방지의 경우도 이와 유사하다고 볼 경우 아마 상당한 심사자의 중복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봐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당대에 뽑힌 작품들이 거의 유사한 세계와 작법을 가진 것에 유의한 적이 있었다. 이는 심사자들의 중복과 관련해서 보면 선명하게 그 문제점이 보인다.
해마다 신춘문예를 시행하는 신문사의 입장이나 선자들이 내세우는 입장은 한결같이 실험적이고 혁신적인 시작과 차후 문단을 이끌어 갈 신인을 발굴한다는 취지를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신춘문예용 작품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정형화된 적품들이 선작되는 현실에서 과연 패기있고 실험적인 작품이 뽑히는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을 것이다. 특히 선자를 명망있는 원로급의 문인들을 초빙하여 선작하겠다는 의도는 문단의 위상으로 보아 충분히 공감이 되지만 과연 이 분들이 참신한 신인 발굴에 얼마나 기여하였는가는 의문이다. 이는 다른 문예지로 등단하는 작품에 비해 신춘문예에 선작된 작품들이 그렇게 뛰어난 작품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라는 점도 지적할만 하다. 환언하면 심사자들의 중복이나 고정은 결국 심사자의 문학적세계에 부합한 작품의 양산을 가져온다는 맹점이 생기는 것이며, 아울러 기성의 문학적 관습과 태도 그리고 세계를 그대로 답습하게 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신춘문예가 오히려 신인들의 패기와 혁신적인 문학적 열정을 죽이는 통제장치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기존 문단의 성향을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 신춘문예작이라고 본다면 신인의 실험성 돋보인 작품의 출현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다음은 5대 신문사가 선작한 작품들이다. 각 작품에 대한 심사평을 원용하면서 신춘문예가 의도하는대로 선작된 것인지 냉정하게 들여다 보자. 먼저 <조선일보>의 경우다.
<조선일보>는 70~80년대엔 박두진 .조병화가 90년대 이후는 황동규와 김주연이 독점적으로 심사하고 있다. 조선일보가 유독 심사위원의 고정성이 가져오는 병폐를 외면하고 있는 현실은 매우 심각한 것이다. 심사 위원의 고정은 문학의 다양한 역동성을 죽이는 행위로 이 두 문인의 시각에 적합하지 않으면 선작이 안된다는 뜻임은 어지간히 짐작이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신문사에서 특정 문인을 심사자로 고정시키는 이면에는 역시 신문사의 이해관계에 가장 맞는 부류라는 역반증이 가능한 것이다. 신문사가 특정한 문학세계를 가진 특정한 신인들을 뽑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폐(폐)타이어-김종현 <2004년 조선일보 당선작>
아파트 공터 한 귀퉁이
속도를 잊은 폐타이어
땅속에 반쯤 묻힌 깊은 침묵 속
햇빛을 둥글게 가두어 놓고
동그랗게 누워 있다
그가 그냥 바퀴였을 때는 단지
속도를 섬기는 한 마리 검은 노예일 뿐이었다
날마다 속도에 사육되고
길들어 갔다
다른 속도가 그를 앞질러 갈 때
그는 바르르 떨며
가속 결의를 다져야 했다
자주 바뀌는 공중의 표정 앞에서는
잽싸게 꼬리를 사려야 했다
검고 딱딱한 세계 위에서 세월을 소모하며
제한된 영역만 누려야 했다
지금 저 동그라미는 자신의 일생이
얼마나 속도에 짓눌려 왔는지 기억하고 있을까
튕겨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했으리라
예약된 모든 속도들 다 빠져나가고
속도는 한 줌 모래처럼 눈부신 한계였을 뿐
얼마나 어지러웠을까
속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속도에 매달린 세월
그가 속도의 덫에서 풀려나던 날
온몸이 닳도록 달려온 일생을 위로하듯
바람은 그의 몸을 부드럽게 핥아주었다
잠시 뒤의 어떤 바람은 풀씨랑 꽃씨를
데리고 와서 놀아주었다
벌레들의 따뜻한 집이 되었다
잃어버린 속도의 기억 한가운데
초록의 꿈들이 자란다
노란 달맞이꽃은 왕관처럼 환히 피어 있다
"당선작 폐타이어가 우리 현실의 핵심을 가로질러 가는 속도의 문제에 대하여 전통적 서정의 회복을 꿈꾸는 시적 자아가 문명의 구체성에 대한 관찰과 한편으로 그 피곤을 어루만지는 시의 힘, 그 부드러움을 탁월하게 대비시켰다" "언어의 조탁보다 오늘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야만스러워져 가는 시대의 중심을 꿰뚫어 바라보면서 시의 존엄을 새삼 이루어 나가려는 박력이 아닐까" -<심사평>황동규, 김주연
심사평에서 위의 시에 대해 밝힌 것은 문명의 피곤을 어루만지는 힘이 탁월하다는 선작의 논지다. 이를 다시 풀면 이 작품이 갖고 있는 문제의식이란 문명에 대한 문제의식(속도)을 폐타이어와 결부하여 보았을 때, 탁월한 것이었다는 설명이 된다.
그럼 소재의 문제에 주목해서 보자. 시작에 나타난 태도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대한 의식을 조장하고 방향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시인의 지각은 어떤 특정한 것과 유용한 것에 주목하기 마련이다. 모든 것들이 공감적이기 위해서는 복잡하고 세밀한 부분까지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필요하다. 폐타이어라는 소재를 통하여 현실의 깊은 구조적인 문제(문명의 야만성)를 드러낼 수 있다고 보는 것 이면에는 '폐타이어=야만의 문명비판' 이라는 도식이 쉽게 도출되는 소재주의에 결과로 밖에 볼 수 없다. 루이스 멈포드는 .『예술과 기술』에서 '기술의 인간화'의 필요성을 말한 적이 있다. 문명에 대한 상투적인 혐오나 기피증을 보이는 것은 오히려 현재의 자본 논리를 설명할 힘이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또한 선작평에서 "시대의 중심을 꿰뚫어 바라보면서 시의 존엄을 이루어 가려는 박력"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상투적인 평가일 뿐 아니라 과잉해석으로 보인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선작 경위를 검증해낼 수 있는 시평이 나오지 않을 경우 선작의 당위성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있을까하는 의문이 남는다. 특히 차선작이 공개되지 않는 통례에 따라 본다면 더더욱 의문이 생긴다. 아울러 지적할 문제로 시적 구조와 전개 그리고 세계관이 지난 97년 서울신문 당선작이었던 박남희의 『폐차장 근처』시와 유사한 면이 없지 않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이미 네티즌의 이름으로 표절시비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선작에 있어서 헛점이 많은가를 스스로 드러낸 결과로 보인다. 아울러 과연 심사자들이 지난 당선작들에 대한 검토가 먼저 이루어진 후에 선작된 것인지 상당히 의문스럽다. 다시 말하면 예, 본선에 참여한 심자자들의 안목이나 역량에 심히 의문스럽다는 말이다. 아니면 당선작이 뽑힌 충분한 논의를 공개하거나 차별성을 선작평에 냈어야 옳을 것이다. 이러한 시비들이 단지 명망있는 선자들이 뽑았다는 이유로 재논의 되지않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이미 2003년도 매일신문 당선작이었던 김옥숙의 『낙타』가 김충규의 『낙타』를 표절했다는 문제제기가 묵살된 적이 있었던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투명한 그리고 공정한 선작을 바라는 모든 문학도들의 관심과 시비에 적극적으로 응답해야 한다고 본다.
<참고자료>
폐차장 근처 -박남희<1997년 서울신문 당선작>
이곳에 있는 바퀴들은 이미 속도를 잃었다
나는 이곳에서 비로소 자유롭다
나를 속박하던 이름도 광택도
이곳에는 없다
졸리워도 눈감을 수 없었던 내 눈꺼풀
지금 내 눈꺼풀은
꿈꾸기 위해 있다
나는 비로소 지상의 화려한 불을 끄고
내 옆의 해바라기는
꿈 같은 지하의 불을 길어 올린다
비로소 자유로운 내 오장육부
내 육체 위에 풀들이 자란다
내 육체가 키우는 풀들은
내가 꿈꾸는 공기의 질량만큼 무성하다
풀들은 말이 없다
말 없음의 풀들 위에서
풀벌레들이 운다
풀벌레들은 울면서
내가 떠나온 도시의 소음과 무작정의 질주를
하나씩 지운다
이제 내 속의 공기는 자유롭다
그 공기 속의 내 꿈도 자유롭다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저 흙들처럼
죽음은 결국
또 다른 삶을 기약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곳에서 모처럼 맑은 햇살에게 인사한다
햇살은 나에게
세상의 어떤 무게도 짐 지우지 않고
바람은 내 속에
절망하지 않는 새로운 씨앗을 묻는다
두번째 작품 <문화일보 당선작>을 보자.
시월의 잠수함 - 김지훈<2004년 문화일보 당선작>
구름이 입술 위에 달라붙는
이 자리는 북한산 어디쯤일까. 지닌 것 없이
숲만 가득 담아둔 나무 그늘에 앉아
기어이 가져온 새 책에 손가락을 베고 말았다
혈이 탁 트이고서야 내 온몸이 잠망경으로 솟아오를 수 있었다
작은 물줄기 속에서도 잘 돌아가는 스크루
사방 가득한 수억 燭의 소리가 큰 닻이 되어
산봉우리들이 신들의 전함으로 불리었던 그 바다 위에 박혀 있다
밤낮이 한꺼번에 몰아오는 내연기관의 큰 울림
그 안에는 칼 대신 나뭇잎 들고 싸우던 날도 있다
힘줄 선명한 잎 하나가 공기를 잘게 저미며 내려온다
신들은 어디에서 배를 만드는 중일까
베어낸 나무 밑동에 그려진 선명한 음파탐지기 자국
나는 녹슨 쇠를 털며 가라앉고 있는 배들의 그림자를 본다
나뭇잎을 칼처럼 쥐고 싸우던 시절
앙상해진 주물기계들이 나뭇가지에 붙어 있다
바람이 떠미는 결이 물 속인 줄 알고
낙엽이 벗었다가 도로 신는 잠수화를 본다
아직도 능선에는 사나운 기운이 넘친다
신들의 칼을 나는 나뭇잎이라고 고쳐 부르고 싶다
이 배를 붙들며 한 자리에서 먼바다를 돌아오는 사계절
내 고함으로 한 방의 어뢰를 뭉쳐
사령관의 함교가 있는 백운대를 한 방 때릴 셈이다
갑판이 낙엽을 털 듯 몸을 털며 다시금 방향을 잡고 나아갈 때
수리공들이 큰배를 향해 떼지어 몰려가는 항로를 따라
푸른 위장을 한 잠수함이 쫓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본심 15명 중에서 다시 두 명, 그리고 한 명은 중복투고로 탈락됨으로써 김지훈의 '시월의 잠수함'이 선작되었다고 한다. 위 작품에 대한 선작평은 다음과 같다.
"당선작으로 결정한 김지훈의 '시월의 잠수함' 은 스케일이 크고 힘이 있는 작품이다. '구름이 입술 위에 달라붙는/ 이 자리는 북한산..으로 시작되는 이 시의 역동성은 현실과 상상, 내면과 외면, 하강과 상승 같은 쌍대(雙對)의 문법을 잘 활용하는 데서 온다고 말할 수 있다. '혈이 탁 트이고서야 내 온몸이 잠망경으로 솟아오를 수 있었다' '능선에는 사나운 기운이 넘친다', '백운대를 한 방 때릴 셈이다' 같은 시행에서 보듯이 호방한 기운도 느껴진다. 그러나 말의 느낌이 큰 시어들을 선택하고 장중한 이미지들을 배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노력이 계곡처럼 깊은 울림을 품은 한 편 시의 웅장함으로 형상화되지는 않은 듯했다."<심사평>-황동규, 최승호
당선작 김지훈의 '시월의 잠수함'은 선작평처럼 수사의 세련성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언술이 모호하고 관념적이어서 포괄적인 의미만 잡힐 뿐 선명한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따라서 현란한 수사만 두드러져 보인다. 시어자체는 역동성을 지녔는지 몰라도 전체적으로 보면 개인적이고 자의식에 절대적인 가치를 주는 메타포어의 난립으로 보인다. "큰 시어들을 선택하고 장중한 이미지들을 배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노력이 계곡처럼 깊은 울림을 품은 한 편 시의 웅장함으로 형상화되지는 않은 듯했다."라는 평가가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적 세련성에 더 많은 초점을 둔 것을 보면 신춘문예의 원취지인 실험적어서 투박하지만 새로운 세계를 지닌 신인 발굴이라는 취지를 저버린 것 같다. 근본적으로 새로운 작품이란 기억, 이미지, 지식, 경험, 인식 등이 한 사회의 열망과 포부를 암시해 내거나 표현, 구현해내는 작업이다. 당선작에서 느끼는 것은 역동적인 시어라기 보다 격앙된 어조이며 과잉 의미를 작품에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장중한 이미지라는 것도 서정이나 감상으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에 대한 깊고 넓은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자연의 현상과 힘을 인간의 역사와 운명, 인류의 문화와 문명과의 관계에서 거론하고 접근하여야 장중하다고 할 것이다. "신춘문예는 하나의 등용문(登龍門)이다. 용문을 오를 때에는 벼락이 치고 꼬리 그을린 큰 잉어가 용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 우리는 걸출한 신인의 출현을 보고 싶다." 라는 선작평에 비해 작품이 드러내는 세계는 탁월한 무엇(체험의 선택), 어떻게(조직과 형상화) 절실하게 드러냈는가라는 질문에 무엇하나 공감할 수 있는 꺼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할 수 밖에 없다. 롤랑바르트의 말처럼 "세련된 언어, 잘쓴 글이라는 표현은 비문학적인 진술이다" 라고 한 말을 다시 생각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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