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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8.08 :: 강수, 그에게 필이 꽂히다
your eyes/issue 2005. 8. 8. 18:28

신라의 삼국통일에 김유신 장군이 무력으로 공을 세웠다면, 강수 선생은 문장으로 통일을 뒷받침한 분이었다.
  통일신라 최초의 대 유학자이며 대문장가인 강수 선생은 본래 집안이 임나 가야 출신이지만 가야의 멸망과 더불어 신라의 사민정책(徙民政策)으로 중원경(지금의 충주), 사량(지금의 어디인지 알 수 없음)으로 옮겨와 살게 되었다.
  아버지는 내마(17간등중 11관등)의 벼슬을 지낸 분이시며 선생의 본이름은 "자두(字頭)라 한다.
  이는 선생의 어머니가 태몽에 뿔이 돋친 사람을 보고 임신하여 낳은 아들이 머리 뒤에 높은 뼈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 듯 하다고 한다.
  머리에 돌출한 뼈를 이상히 여긴 아버지는 당시의 현자를 찾아가서 물으니 현자가 대답하기를 "복희씨는 범의 형상이요, 여와씨(복희씨의 누이)는 뱀의 몸이고,신농씨는 소의 머리요, 고도는 말의 입이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성현들은 그 상이 비슷하면서도 일반 사람들과 다른데 이 아이를 보니 머리에 검은 사마귀가 있으니 귀이하며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강수는 자라나면서 남다른 재능을 발휘하여 제 스스로 글을 읽고 그 뜻을 환히 통달하였다. 불교보다는 현세적이고 합리적인 유교를 숭상하였으며 도덕주의자였다. 그는 일찍이 부곡의 대장장이 딸과 사귀어 정을 통하고 있었다.
  나이 20세 되는 해에 부모가 가문있는 집안의 규수를 들이고자 하니 강수는 거절하면서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바가 아니지만 도를 배우고 행하지 않는 것은 진실로 부끄러운 바입니다. 일찍이 옛사람의 말에 조강지처는 버리지 아니하고 가나할 때 사귄 친구는 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미천한 아내라고 해서 차마 버릴 수는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태종 무열왕 때, 당나라의 사신이 와서 조서(詔書)를 전하였는데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구절이 있었다. 왕이 강수를 불러 물으니 한번 보고 해석을 하는데 의심스럽거나 막히는 바가 없었다. 이에 왕은 놀라고 기뻐하면서 당의 조서에 대한 회사(回謝)를 강수에게 짓게 하였는데 문장이 훌륭하고 뜻이 충분히 나타나 있었다.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한 것은 무공이라 하지만
   또한 문장의 도움이 있었으니...

  삼국통일의 민족적 위업이 성취되어 가는 역사적 과정에서 강수의 학문적인 실력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확실한 근거는 없으나 문무왕 11년(671년)에 당나라 총관 설인귀가 보내온 글에 답하여 보낸 2,440여자의 대 문장은 강수의 작품이라고 한다.
  문무왕 13년 왕은 다음과 같이 강수의 문장력에 대한 치적을 말하고 있다.
 "강수의 문장서한으로 중국과 고구려, 백제에 나라의 뜻을 전하였기 때문에 우호관계를 맺는데 성공하였다. 우리 선왕(무열왕)이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한 것은 무공이라 하지만 또한 문장의 도움이 있었으니 어찌 강수의 공을 소홀히 생각할 수 있는가.""
  강수의 사망연대는 정확한 자료가 없어 알 수 없으나 신문왕(681--692) 때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처: http://gochungju.co.kr/jboard/?p=detail&code=hero&id=33&page=1

 

강수 (强首)는 신라통일기의 유학자이며 문장가로서 활약하였는데, 지금의 충주인 중원소경(中原小京) 출신으로 부친은 내마(柰麻) 석체(昔諦)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삼국사기』 강수전에는 그가 효경(孝經), 곡례(曲禮), 이아(爾雅), 문선(文選) 등을 주로 공부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통일기인 태종무열왕과 문무왕 때 외교 문서를 작성하는 등 문장으로서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는 무열왕이 출신을 묻자, 자신은 본래 ‘임나가량인’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가 당시에 유행하던 불교를 택하지 않고 유학에 뜻을 둔 것은, 신라 말 최치원이 육두품이었다는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진골 중심의 골품제사회에서의 한계성에서 벗어나려는 육두품 이하 계층들의 학문적 경향 때문으로 보입니다.

신문왕 때 그가 죽자 왕은 후하게 장사를 지내주고 많은 물품을 하사하였으나 그 아내는 이를 받지 않고 향리로 돌아가 버렸다고 합니다. 강수의 아내는 신분이 낮은 부곡의 대장장이의 딸이었으나 그는 주위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버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신라가 신분제사회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의 윤리관은 새로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강수는 가야 출신이면서 육두품 이하의 신분으로 유학,문장학을 가지고 신라사회에 진출한 최초의 신흥유교관료의 성격을 가졌던 문인으로서 사회사상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출처: http://210.103.88.93/gaya/History/documents/whoson.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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