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삼국통일에 김유신 장군이 무력으로 공을 세웠다면, 강수 선생은 문장으로 통일을 뒷받침한 분이었다.
통일신라 최초의 대 유학자이며 대문장가인 강수 선생은 본래 집안이 임나 가야 출신이지만 가야의 멸망과 더불어 신라의 사민정책(徙民政策)으로 중원경(지금의 충주), 사량(지금의 어디인지 알 수 없음)으로 옮겨와 살게 되었다.
아버지는 내마(17간등중 11관등)의 벼슬을 지낸 분이시며 선생의 본이름은 "자두(字頭)라 한다.
이는 선생의 어머니가 태몽에 뿔이 돋친 사람을 보고 임신하여 낳은 아들이 머리 뒤에 높은 뼈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 듯 하다고 한다.
머리에 돌출한 뼈를 이상히 여긴 아버지는 당시의 현자를 찾아가서 물으니 현자가 대답하기를 "복희씨는 범의 형상이요, 여와씨(복희씨의 누이)는 뱀의 몸이고,신농씨는 소의 머리요, 고도는 말의 입이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성현들은 그 상이 비슷하면서도 일반 사람들과 다른데 이 아이를 보니 머리에 검은 사마귀가 있으니 귀이하며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강수는 자라나면서 남다른 재능을 발휘하여 제 스스로 글을 읽고 그 뜻을 환히 통달하였다. 불교보다는 현세적이고 합리적인 유교를 숭상하였으며 도덕주의자였다. 그는 일찍이 부곡의 대장장이 딸과 사귀어 정을 통하고 있었다.
나이 20세 되는 해에 부모가 가문있는 집안의 규수를 들이고자 하니 강수는 거절하면서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바가 아니지만 도를 배우고 행하지 않는 것은 진실로 부끄러운 바입니다. 일찍이 옛사람의 말에 조강지처는 버리지 아니하고 가나할 때 사귄 친구는 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미천한 아내라고 해서 차마 버릴 수는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태종 무열왕 때, 당나라의 사신이 와서 조서(詔書)를 전하였는데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구절이 있었다. 왕이 강수를 불러 물으니 한번 보고 해석을 하는데 의심스럽거나 막히는 바가 없었다. 이에 왕은 놀라고 기뻐하면서 당의 조서에 대한 회사(回謝)를 강수에게 짓게 하였는데 문장이 훌륭하고 뜻이 충분히 나타나 있었다.
삼국통일의 민족적 위업이 성취되어 가는 역사적 과정에서 강수의 학문적인 실력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확실한 근거는 없으나 문무왕 11년(671년)에 당나라 총관 설인귀가 보내온 글에 답하여 보낸 2,440여자의 대 문장은 강수의 작품이라고 한다.
문무왕 13년 왕은 다음과 같이 강수의 문장력에 대한 치적을 말하고 있다.
"강수의 문장서한으로 중국과 고구려, 백제에 나라의 뜻을 전하였기 때문에 우호관계를 맺는데 성공하였다. 우리 선왕(무열왕)이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한 것은 무공이라 하지만 또한 문장의 도움이 있었으니 어찌 강수의 공을 소홀히 생각할 수 있는가.""
강수의 사망연대는 정확한 자료가 없어 알 수 없으나 신문왕(681--692) 때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국사기』 강수전에는 그가 효경(孝經), 곡례(曲禮), 이아(爾雅), 문선(文選) 등을 주로 공부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통일기인 태종무열왕과 문무왕 때 외교 문서를 작성하는 등 문장으로서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는 무열왕이 출신을 묻자, 자신은 본래 ‘임나가량인’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가 당시에 유행하던 불교를 택하지 않고 유학에 뜻을 둔 것은, 신라 말 최치원이 육두품이었다는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진골 중심의 골품제사회에서의 한계성에서 벗어나려는 육두품 이하 계층들의 학문적 경향 때문으로 보입니다.
신문왕 때 그가 죽자 왕은 후하게 장사를 지내주고 많은 물품을 하사하였으나 그 아내는 이를 받지 않고 향리로 돌아가 버렸다고 합니다. 강수의 아내는 신분이 낮은 부곡의 대장장이의 딸이었으나 그는 주위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버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신라가 신분제사회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의 윤리관은 새로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강수는 가야 출신이면서 육두품 이하의 신분으로 유학,문장학을 가지고 신라사회에 진출한 최초의 신흥유교관료의 성격을 가졌던 문인으로서 사회사상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라시대에 외교 문장을 잘 썼던 것으로 유명한 강수는 태어날 때부터 머리 뒤쪽에 뼈가 튀어나와 있었다. 신라 무열왕이 그를 만나 성명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은 본래 김해 사람으로 이름은 우두(牛頭)입니다.”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그대의 머리뼈를 보니 강수(强首)선생이라 불러야겠다.” 하여 그 뒤로 강수가 되었다. 원래 이름인 ‘쇠머리’나 임금이 지어준 ‘강한 머리’나 모두 뿔처럼 삐죽 나온 머리뼈 모양에서 딴 이름이다.
고려 태조의 아들로 2대왕이 된 혜종은 얼굴에 돗자리 무늬가 있어서 ‘주름 임금’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가 미천한 사람이라서 태조가 동침을 하고서도 아이 낳지 않기 위해서 깔고 있던 돗자리에 사정을 했는데, 그녀가 이를 다시 흡입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 사람이 혜종이다. 이런 이유로 얼굴에 돗자리 무늬가 생겼다고 전해진다.
조선 세조 때에 종친인 이철(李徹)은 술에 취하면 눈동자가 맑지 못했는데, 임금이 이를 희롱하여 ‘물거윤(勿巨尹)’이라 붙여주었다고 한다. 당시 말에 눈이 맑지 않은 것을 ‘물거’라고 하였던 데에서 유래한다고 하는데, 물거란 ‘묽다’는 말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렇게 사람의 모습에 따라 이름이나 별명이 붙여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외모와는 달리 사람의 내면을 평가하기란 참 어렵다. 사람을 네 가지로 분류하면서 그 기준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 것이 있다.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재주와 덕이 겸비되어 있으면 성인(聖人)이라 이르고, 재주와 덕이 둘 다 없으면 우인(愚人)이라 이르며, 덕이 재주보다 나으면 군자(君子)라 이르고, 재주가 덕보다 나으면 소인(小人)이라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선택할 때에 소인보다 우인이 낫다는 것은, 소인이 재주를 끼고 나쁜 짓을 할까 두려워 하기 때문입니다.(태종실록 4년<1404> 8월 20일)
이런 사람 평가의 기준은 너무나 추상적이기 때문에 현실에 적용할 때에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누구나 양면성을 띠고 있어서 ‘이 사람이 이렇다’고 단정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역사서에는 인물에 대한 평가가 항상 등장한다. 칭찬과 징계를 밝힘으로써 후대 사람들의 본보기를 삼게 하는 것이 동양 역사서의 주요 기능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평가는 분명히 일면만 강조된 것이겠지만, 그것만 남은 상황에서는 그 인물에 대한 이미지는 그것으로 고정될 수밖에 없다.
조선 세종 때 통역관이었던 임군례(任君禮)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재미있는 별명이 붙여졌다.
임군례를 저자 거리에서 수레로 찢어죽이는 형벌에 처하였다. 그 아비 임언충(任彦忠)은 한족(漢族) 통역관으로 개국공신이 되었기 때문에 그도 충의위(忠義衛)에 소속되었는데, 인품이 욕심많고 야비하였다. 통역관으로 여러 번 명나라에 사신을 따라간 것을 계기로 큰 부자가 되었으면서도, 한시라도 세력 있는 사람에게는 꼭 아부를 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오방저미(五方猪尾)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돼지는 꼬리를 잘 흔들기 때문에, 쫓아다니며 아부하기 좋아하고 아부하지 않는 곳이 없는 사람을 세상에서 오방저미라고 한다.(세종실록 3년<1421> 2월 18일)
아마 쉴 새 없이 사방으로 흔들어대는 짝달막한 돼지꼬리를 보았던 사람은 이 뜻을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방으로 흔들어대는 돼지꼬리’란 말이 조선 초기에 아부꾼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반대로 평소에 쌓은 인품으로 화를 면한 사례도 보인다. 고려시대 무신이었던 정중부가 난을 일으켰을 때에 최유청(崔惟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정중부 난에 문관들이 모두 살해당하였으나 여러 장수들이 평소부터 최유청의 덕망에 감복하고 있었는지라 군사들에게 그 집은 다치지 말라고 경계하였던 까닭에 최유청을 비롯한 친척까지 모두 다 화를 면하였다.(고려사 권99, 최유청 전기)
한편, 형제지간에도 평가가 엇갈리는 경우가 종종 발견된다. 이에 앞서 형제간의 우애를 보여주는 사례를 하나 보겠다.
당시에 어떤 형제가 같이 길을 가다가 아우가 황금 두 덩이를 얻어서 그 하나를 형에게 나누어 주었다. 양천강(陽川江)에 이르러 배를 타고 함께 강을 건너는데 아우가 갑자기 황금을 물 속에 던졌다. 형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물은니, 대답하기를 “평소에 저는 형님을 대단히 사랑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금을 나누어 가지고는 형님을 꺼리는 마음이 갑자기 싹트니 이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강에 던지고 잊어 버리려고 한 것입니다”고 하였다. 형도 “네 말이 옳다”고 하고 역시 황금을 물 속에 던졌다. 그때 함께 배에 탔던 사람들은 모두 어리석은 사람들이라 그 형제의 성명과 주소를 물어 보지 않았다 한다.(고려사 권121, 정유 전기)
이렇게 우애에 관한 미담이 있는가 하면, 역사 기록에는 형제간에 인물평이 엇갈리는 경우가 보이는 것이다. 조선시대 1등 개국공신이면서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과 함께 죽임을 당했던 남은(南誾, 1354-1398)에게는 역시 1등 개국공신이 된 형 남재(南在, 1351-1419)가 있었는데, 그가 사망했을 때에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렸다.
개국 공신이 되자, 세도를 믿고 남의 노비를 많이 탈취하였다. 무인년에 판정도감(辦定都監) 제조(提調)가 되었을 적에 어떤 사람이 남재를 고소한 일이 있었는데, 그가 성을 내어 딴 일을 가지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핍박하니, 그 사람은 분해서 죽었다. 그 까닭에 만년에는 재산이 제법 많았다. 또 그의 아우 남실(南實)과 살림을 다투어서 종신토록 화목하지 못하였으며, 남실이 아침 밥을 겨우 먹는데도 도와주지 않았다.(세종실록 원년<1419> 12월 14일)
역시 개국공신이었던 조준(趙浚, 1346-1405)과 그의 동생 조견(趙狷, 1351-1425)은 조선 개국과 함께 상반된 길을 갔다고 전해진다. 후대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정조 때에 김상목이 상소한 내용에 조견의 행적이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고려의 운명이 끝났다는 소문을 듣고 통곡하면서 두류산에 들어가 자기 이름을 고쳐 조견(趙狷)이라 하였으니, 이는 대개 개 견(犭=犬) 자를 따른 것으로서 나라가 망해도 따라죽지 못한 것이 개와 같다는 뜻이며, 또한 개는 옛 주인을 생각한다는 뜻을 취한 것입니다. 두류산에서 다시 청계산으로 왔는데, 매번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 개성을 바라보면서 통곡하였습니다. 태조가 호조전서(戶曹典書)로 발탁하여 초빙하는 서신을 보내니, 답하기를 ‘송악산의 고사리를 캐어 먹고 살지언정 성인의 백성이 되기는 원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루는 태조가 조준과 더불어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청계산으로 가서 조준으로 하여금 나오도록 권고하게 하였는데, 조견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조준이 이불을 어루만지면서 이르기를 ‘내가 만나보지 못한 지도 벌써 여러 해가 되었다. 형제간의 정의에 어찌 그리운 생각이 없었겠는가.’고 하니, 조견이 이불 속에서 대답하기를 ‘나라도 없어지고 집도 망하여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데 형제를 어떻게 알겠습니까?’고 하였습니다. 조준이 나와서 고하기를 ‘신의 아우의 성품이 편협해서 신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고 하니, 태조가 이르기를 ‘나와 옛 친분이 있으니 손님과 주인의 예의로 서로 만나볼 수 없겠는가?’고 하였습니다. 조견은 비로소 의관을 정제하고 나와 고개만 숙이고 절은 하지 않았습니다. 태조는 칭찬하고 감탄하면서 말하기를 ‘조견은 그 뜻이 금석 같아서 빼앗을 수 없다.’ 하고 청계산 한 구역의 땅을 봉해주었습니다.
조견은 양주 땅에 옮겨 살면서 자기의 호를 자칭 송산(松山)이라 하였으니, 이는 대개 송악(松嶽, 개성)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었습니다. 조견은 이따금 송도(松都)에 가서 월대(月臺)의 폐허에서 통곡하니, 옛 도성의 유민들이 저마다 따라서 슬퍼하였습니다. 조견은 일찍이 철석(鐵石) 두 글자로 자기 두 아들의 이름을 지었으며, 죽을 때 임박하여 경계하기를 ‘나의 묘비에는 고려의 안렴사라고 쓰라.’ 하였으나 여러 아들들이 유언을 감히 따를 수 없어 조선조에서 내린 관직이름을 비석에 썼는데, 얼마 안 되어 비석이 갑자기 절반으로 꺾여져 ‘조공지묘(趙公之墓)’라는 네 글자만 남아 지금도 그대로 있습니다.(정조실록 14년<1790> 10월 14일)
세조가 김종서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잡았을 때에 여진족을 등에 업고 ‘대금황제’를 자칭하며 반기를 들었던 이징옥(李澄玉, ?-1453)도 그의 형 이징석(李澄石, ?-1462)과 아주 대조적이었다.
이징석과 이징옥은 모두 명장(名將)이다. 그러나 이징석은 탐욕스럽고 비루하여 재산을 영위하는 데에 부지런하고, 이징옥은 청렴하고 고고하여 자기 도리를 지켰다. 이징석이 일찍이 이징옥에게 말하기를, “청백은 복 없는 사람의 딴 이름이다.”고 하였다.(문종실록 원년<1451> 6월 1일)
다른 기록에서도 이징석은 탐욕스럽고 음란하여 아버지가 죽자 땅을 두고 다투며 막대기로 아우를 때린 적이 있고, 친척이 계집종을 보내어 뒤늦게 문상을 하니 밀실로 끌어들여 간음하였다고 전한다.
이들은 이미 어렸을 때부터 성격이 대조적이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산 멧돼지를 보고싶다고 하여 두 형제가 사냥을 나갔는데, 형은 그 날로 멧돼지를 활로 쏘아 죽여서 잡아왔지만, 동생은 이틀이나 힘들게 몰이를 해서 기진맥진한 멧돼지를 산채로 끌고 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런 성격 차이로 평소에도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이것이 운명을 갈라놓기도 하였다. 동생 이징옥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형이 아들과 함께 연좌되어 감옥에 들어갔는데, 세조는 “평소에 동생과 사이가 나쁘고 내통이 없다”고 하여 석방되었고, 죽음 대신에 오히려 세조의 찬탈을 도운 공신으로 책봉되었다. 성격이 모났기 때문에 죽음을 면하고 더 오래 사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는 듯하다.
역사상 유명한 인물도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여기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평가된 사례를 세 가지 들어보겠다.
먼저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서 다 닳고, 두만강 물은 말이 마셔 없어지도다. 남아 스무살에 아직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였으니,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일컬으리요”라는 기개 있는 한시로 우리 머리 속에 남아 있는 남이(南怡, 1441-1468) 장군에 대한 평가이다.
남이는 활 잘 쏘는 김연근·신정보 등을 천거하고 유자광은 최강을 천거하므로, 이들을 불러서 쏘게 하였는데, 최강이 많이 맞추어서 활 1장(張)을 내려 주었다. 또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내어서 다시 쏘아서 많이 맞춘 이숙기에게 주게 하였다. 남이는 일찍이 대장(大將)이라 자칭하며 한때 무사를 멸시했는데, 이 날은 여러 번 쏘아도 맞추지 못하므로 임금이 웃었다.(세조실록 권 14년<1468> 5월 1일)
이 구절로 보아서 남이는 과시형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런 그가 궁궐에서 숙직하다가 혜성이 나타나자 “혜성의 등장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다.”라고 말했다가 모함을 받아 처형당했다. 그 뒤에 무슨 이유에선지 그의 죽음은 억울함으로 비추어졌고, 이에 따라 그와 관련된 구전설화가 전국에 고루 전해지게 되었다. 그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져서 붙여진 가평 부근의 남이섬이 한류와 더불어 다시 부각되고도 있다.
암행어사와 관련된 설화가 워낙 많아서 암행어사 하면 당장 떠오를 정도로 유명한 영조 때의 박문수(朴文秀, 1691-1756)의 성품도 예상과는 달리 상당히 거칠었던 것 같다.
대개 박문수가 병조판서가 되었을 때 훈련대장 구성임과 연석(筵席)에서 서로 꾸짖고 욕을 하며 너니 네니 하기에 이르렀던 적이 있었으므로, 그 상소가 이와 같았던 것이다. 박문수는 성품이 거칠고 낭패스러웠으니, 일찍이 임금 앞에서 윤유와 서로 꾸짖고 욕을 하여 대간(臺諫)의 논박까지 받았는데, 또 구성임과 서로 싸웠으므로 임금이 둘 다 죄를 주었다.(영조실록 19년<1743> 1월 7일)
영성군(靈城君) 박문수가 사망하였다. 박문수는 춘방(春坊:세자 시강원)에 있을 때부터 이미 임금이 알아주었고, 무신년 반란(1728년 이인좌의 난) 때에 조현명과 더불어 원수(元帥)의 막부(幕府)를 도와 개선해서 돌아오니 임금의 총애가 날로 융숭하여 아주 높은 벼슬에까지 이르렀다. 나랏일에 대해서는 마음을 다하여 해이하지 아니하여 병조․호조에서 바르게 고치고 개혁한 것이 많았으며, 여러 차례 병권(兵權)을 장악하여 사졸의 환심을 얻었다. 그러나 연석에서 때때로 간혹 골계(滑稽:익살)를 하여 거칠고 조잡한 병통이 있었다. 또 이광좌(소론 대표자)를 사표로 삼아 지론이 시종일관 변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때문에 끝내 정승에 제수되지 못하였다. 그가 졸함에 미쳐 임금이 슬퍼하여 마지 않았다.(영조실록 32년<1756> 4월 24일)
그는 소론의 거두 이광좌를 끝까지 사표로 삼아 정승이 되지 못하였을 정도로 고집이 셌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왕 앞에서마저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신하와 싸움을 할 정도로 평소 행동은 거칠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실록을 읽다가 이들보다 더 의외의 평가를 내린 대목을 발견하게 되었다. 태종이 “공신은 아니지만 나는 공신으로서 대우했고, 하루라도 접견하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서 접견했으며, 하루라도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할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정승 황희(黃喜, 1363-1452)에 대한 기록이다.
황희는 판강릉부사(判江陵府事) 황군서(黃君瑞)의 얼자였다. 김익정과 더불어 서로 잇달아 대사헌이 되어서 둘 다 중 설우(雪牛)의 금을 받았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황금 대사헌」이라고 하였다.
또 난신(亂臣) 박포(朴苞)의 아내가 죽산현(竹山縣)에 살면서 자기의 종과 간통하는 것을 우두머리 종이 알게 되니, 박포의 아내가 그 우두머리 종을 죽여 연못 속에 집어 넣었는데 여러 날만에 시체가 나오니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현관(縣官)이 시체를 검안하고 이를 추궁하니, 박포의 아내는 사실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여 도망하여 서울에 들어와 황희의 집 마당 북쪽 토굴 속에 숨어 여러 해 동안 살았다. 황희가 이때 간통하였고, 그 뒤 박포의 아내가 일이 무사하게 된 것을 알고 돌아갔다.
황희가 장인 양진(楊震)에게서 노비를 물려받은 것이 단지 3명뿐이었고,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도 많지 않았는데, 집안에서 부리는 자와 농가에 흩어져 사는 자가 많았다. 정권을 잡은 여러 해 동안에 매관매직하고 형벌과 관련하여 뇌물을 받았으나, 그가 사람들과 더불어 일을 의논하거나 혹은 자문에 대답할 때에는 언사가 온화하고 단아하며, 의논하는 것이 다 사리에 맞아서 조금도 틀리거나 잘못됨이 없으므로, 임금에게 무겁게 보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심술은 바르지 아니하니, 혹시 자기에게 거스리는 자가 있으면 몰래 중상하였다.(세종실록 권40, 10년<1428> 6월 25일)
황희는 얼자(孽子:천민 출신 첩의 아들)였고, 박포 아내와 간통하였으며, 매관매직과 뇌물을 통하여 재산을 불렸다고 적혀 있다. 또 심술궂은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황희 정승의 알려진 이미지와 너무나 달라서 의아하게 생각했었는데, 마침내 그 의문이 나중에 풀렸다.
단종 때에 실록을 편찬하면서 이 기록이 논란이 되었던 사실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 {세종실록}을 편찬하였는데, 지춘추관사 정인지가 사관(史官) 이호문(李好問)이 기록한 황희의 일을 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듣지 못한 것이다. 감정에 치우치고 근거가 없는 것 같으니, 마땅히 여러 사람들과 의논하여 정해야겠다.” 하고, 영관사 황보인, 감관사 김종서, 지관사 허후, 동지관사 김조·이계전·정창손, 편수관 신석조·최항과 더불어 이호문이 쓴 것을 가지고 조목에 따라서 의논하기를, “그가 이르기를, ‘황희는 황군서의 얼자라.’고 한 것은 일찍이 이러한 말이 있었다. 황희도 또한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정실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그 밖의 일은 전에 황희 초상화 듣지 못하였다.” 하니,
허후가 말하기를, “우리 아홉 사람이 이미 모두 듣지 못하였으니 이호문이 어찌 홀로 알 수 있었겠는가? 나의 선친께서 매번 황희 재상을 칭찬하고 흠모하면서 존경하여 마지 아니하였다. 사람됨이 도량이 매우 넓으며 기쁨과 노여움을 나타내지 아니하였다. 재상이 된 지 거의 30년간 진실로 더러운 소문이 없었는데, 어찌 남몰래 사람을 중상하고 관작을 팔아먹고 옥사에 뇌물을 받아서 재물이 거만(鉅萬)이었겠는가? ··· 그가 ‘김익정이 황희와 더불어 서로 잇달아 대사헌이 되어서, 모두 중 설우의 금을 받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황금 대사헌」이라고 일컬었다.’ 하였으나, 이것도 또한 알 수가 없다. 이미 말하기를, ‘당시 사람들이 이를 일컬었다.’ 하였는데, 지금 여기에 앉아 있는 8, 9인은 어찌 한 사람도 들은 적이 없는가? 이호문은 나의 친속이지만 사람됨이 조급하고 망령되고 단정치 못한데, 그 말을 취하여 믿을 수 없으니, 이를 삭제함이 어떠한가?” 하였다.
김종서가 말하기를, “박포의 아내 사건은 집 안의 은밀한 일이니, 진실로 쉽게 알 수 없다. 그 밖의 일은 마땅히 사람의 이목을 피할 수 없는데 어찌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을까? 김익정은 나의 재종형(再從兄)으로, 내가 그 사람됨을 자세히 안다. 스스로 청렴하고자 하였고 스스로 신의있고자 하였는데, 그가 도량이 작다고 일컫는 것은 가하지마는, 대사헌이 되어서 남의 뇌물을 받았다는 것은 단연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사필(史筆)은 다 믿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만일 한 사람이 개인 감정에 따라서 쓰면 천만년을 지난들 능히 고칠 수 있겠는가?” 하였다.(단종실록 즉위년<1452> 7월 4일)
결국, 사관이었던 이호문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쓴 것으로 밝혀졌다. 이 때문에 이를 삭제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문제로 의논이 이어진다. 그러나 삭제하는 선례를 남기면 나중에 마음에 안드는 대목을 맘대로 빼내는 폐단이 일어날까 염려하는 의견도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왜곡된 황희의 평가는 그대로 살아남게 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이 왜곡 문제가 불거진 기록도 남게 되어 황희는 억울한 누명을 벗을 수가 있었다.
이처럼 인물 평가는 역사 기록자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실제와는 동떨어지게 왜곡되는 상황도 벌어진다. 그 왜곡을 바로잡을 수 있는 반대의 증거가 남겨지지 않는 한 영원히 잘못된 평가 속에 남게 될 소지가 있다. 따라서 역사가로서 인물 평가나 역사적 사실의 평가를 해야 할 경우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더 조심스럽고 어려워지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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