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서 동성애를 만나는 것은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닐 뿐더러 최근에는 트렌드로 각광받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소규모 개봉이지만 관객이 꾸준히 들고 있는 <메종 드 히미코>와 아카데미 수상작으로 유력한 후보인 <브로크백 마운틴>은 동성애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들로 주목받고 있다. 놀라운 것은 국내 영화들도 동성애에 차츰 문을 열고 있고 더욱이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점이다. 천만 관객을 바라보는 <왕의 남자>와 옴니버스 멜로 영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은 비록 암시하는 수준에 불과하긴 하지만 동성애 묘사에서 의미 있는 일보를 내디딘 영화들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런 영화들에서 동성애는 삶의 한 단면으로서 묘사된다. 특히 <메종 드 히미코>는 다른 성적 정체성을 포용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문제를 잔잔하게 제시하는 영화다. 대체로 영화에서 동성애의 문제는 계급이나 인종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윤리학으로 귀착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번 글에서 살펴볼 텍스트는 영화가 아니라 책이다. 윤리의 문제는 설득의 문제지만 학문적인 이론은 사실 설명의 문제다. 동성애를 설명하고 있는 많은 책들 가운데 상이한 두 입장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이성애, 동성애 모두 본능이 아닌 환상

기시다 슈의 『 게으름뱅이 정신분석 1』
(깊은샘)
첫 번째는 심리학자가 바라보는 동성애 현상이다. 기시다 슈는 ‘사적 유환론’이라는 독특한 이론으로 알려져 있는 학자로, 그의 입장을 단순화시키면 인간의 모든 제도(성을 포함)가 환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성의 문제로 한정시켜 설명하면, 인간은 성적 본능이 고장 난 동물이고 종족 보존이라는 명제를 수행하기 위해 환상을 가동시켜 성욕을 자극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인간은 왜 이렇게 성적 본능을 잃어버리게 되었을까?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신체적 발달과 정신적 발달이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유아는 심리적 욕구는 있지만 신체적으로 무능력한 존재이고, 이 때문에 계속해서 욕구가 좌절되어 성인이 되었을 때 환상이라는 형식으로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기시다 슈의 독특한 성 이론은 『성은 환상이다』에 잘 드러나 있지만, 이 글의 주제인 동성애 문제를 보려면 예전에 소개되어 지금은 구하기 어려운 『게으름뱅이 정신분석 1』을 참고해야 한다. 여기서 그는 프로이트주의 심리학자다운 설명을 들려준다. 대충 요약하면 이렇다. 인간의 성욕의 출발점은 유아기 때의 자기만족이다. 이 시기에는 대상과 자아의 구별이 없고 남녀의 구별도 없다. 그러다가 서서히 자아가 대상으로부터 구별되고 그에 따라 욕구가 좌절되기 시작한다. 이런 분리와 좌절은 극복되어야 하는데, 남자아이의 경우 성적 인식과 합일의 욕구는 어머니와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어머니와의 결합을 통해 자아의 완전함을 복구하고 퇴행적인 자기만족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아버지의 존재가 문제가 된다. 아버지로 인해 자신의 무력감을 느끼고 또 다시 욕구의 좌절을 맛본 아들은 결국 다른 여성에게로 눈을 돌림으로써 만족을 찾는다. 이렇게 해서 이성애의 단계에 안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무사히 이런 경로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시를 느끼고 적절한 시기에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게 아버지가 충분히 권위적이고 힘 있는 존재여야 한다. 이런 과정이 심각한 방해를 받으면 이성애라는 환상은 유지되지 못한다. 모친의 과호보가 계속되면서 자신의 남자로서의 정체성에 확신을 갖지 못해 불안을 느끼며 다른 남자에게서 부족한 부분을 메우려 하는 것이다.
결국 기시다 슈에게 있어서 동성애의 문제는 이성애의 문제와 같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동성애뿐만 아니라 이성애 역시도 본능과는 거리가 있는 환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성애를 정상적인 것으로, 동성애를 비정상으로 여기는 것은 문화적 관습이지 생물학적 유전자가 아니다. 성욕의 대상은 잃어버린 자아의 일부이고, 성 행위는 유아기의 전체적 자아를 회복하기 위한 행위로 종족 보존과 무관한 일종의 놀이다.
동성애는 인간의 유아적 특징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

클라이브 브롬홀의 『영원한 어린아이, 인
간』(작가정신)
이번에는 생물학자의 의견을 들어보자. 클라이브 브롬홀이 쓴 『영원한 어린아이, 인간』은 동성애에 대해 흥미로운 설명을 담고 있다. 그의 설명의 출발점은 인간이 진화 과정에서 유인원과 갈라지면서 유아기가 연장된 독특한 종으로 진화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독특한 해부학적 특징들, 가령 몸에 털이 거의 없고, 얼굴의 굴곡이 작고, 통통한 입술이 있고, 직립보행을 하는 등의 특징은 침팬지 태아의 모습과 흡사하다. 결국 인간은 발달과정이 중간에서 멈춰버려 유아의 특징이 성인기까지 그대로 이어지게 된 종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이 보이는 독특한 특징들을 설명해준다. 그중에서도 인간의 성적 특징들이 주목할 만한데, 사디즘, 근친상간, 아동성애 같은 생물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은 모두 유아화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들이다. 물론 동성애도 그 가운데 하나다.
동성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발달과정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처음에는 온통 어머니에게만 관심을 쏟다가 점차 또래 아기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데, 다섯 살 정도가 되면 놀이친구의 성별을 인식하기 시작하며 여섯 살부터 열두 살 때까지는 온통 동성 친구하고만 관계를 맺는다. 그러다가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동성끼리 몰려다니던 습관이 점차 사라지고 이성과의 관계를 찾아 나서기 시작한다. 그런데 극단적으로 유아화된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동성들하고만 관계를 맺는 단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이들이 바로 동성애자들이다.
이것은 청소년기에 많은 이들이 동성애를 경험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설명해주며, 또한 예술과 학문 분야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자들이라는 사실도 설명해준다. 유아적인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호기심이 많고 사교적이고 사고가 유연하다는 말이고, 결국 창의력과 상상력이 뛰어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클라이브 브롬홀에게 동성애는 인류가 유아기로 퇴행하면서 나타나는 불가피한 결과 중 하나다. 동성애자는 치료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인류의 유아적인 특징을 남들보다 더 많이 갖고 있는 사람에 불과하다. 유아화가 인류를 다른 영장류와 차별적인 길을 걷게 한 핵심적인 요소였음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동성애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진화된’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들은 하나의 개체로서 자신의 특성을 후손에게 물려주지는 못하지만 대신 인류 전체를 위해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사회에 공헌한다.
성을 즐기는 보노보

보노보. 침팬지와 비슷하지만 보노보의 머리
중앙엔 가르마가 선명하다.
동성애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반감은 자연에 반하는 행동이라는 비판일 것이다. 여기서 자연은 동물 세계를 말하는 것인데, 동물과 다른 인간 특유의 행동이 한둘이 아니거니와 사실 동물 세계에서도 동성애 행동은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동물의 독특한 성 생활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흥미로울 책으로 프란스 드 발의 『내 안의 유인원』이 있다. 여기서 ‘영장류 세계의 히피족’인 보노보가 보여주는 성 생활은 포르노그래피를 방불케 한다. 보노보는 한때 침팬지로 분류되었으나 지금은 완전히 새로운 종으로 인정받고 있는데, 섬세한 이목구비와 굴곡이 적은 얼굴, 둥근 두개골에 작은 턱은 유아적인 특징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보노보가 무엇보다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협력적인 성격과 유희적인 사교성, 그리고 섹스를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보노보는 섹스의 대상을 가리지 않아 동성끼리는 물론 어린 새끼와도 성교를 하고, 정상위를 포함한 여러 체위를 소화하며 자위도 즐긴다. 이런 것들이 단순히 생식을 위한 활동이 아님은 분명하다. 보노보에게 섹스는 사회의 화합을 다지는 윤활유인 동시에 쾌락의 도구이다. 그러니 이들에게 이성애와 동성애의 구별, 바람직한 섹스와 그렇지 못한 섹스의 구분은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보노보가 행동학적으로 우리 인류와 가장 가까운 영장류임을 생각할 때 성에 대한 유연한 태도는 진화론적으로 앞서가는 것임이 또 한번 입증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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