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재창작 - 문학작품 번역의 즐거움과 어려움
문학의 재창작 - 문학작품 번역의 즐거움과 어려움
비르기트 메어스만(칼스루에)
문학작품, 특히 서정시의 번역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넋두리는 이제 번역연구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부분이 되었습니다. 실패할거라는 불길한 예감에도 불구하고 번역가들은 마치 시지푸스처럼 계속해서 불가능한 것을 과감히 시도하며 새롭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세계화(전지구화)는 언어와 문화간의 교류를 살찌우고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번역은 엄청난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새로운 문제에 직면해 있기도 합니다. 문학작품과 문화를 번역하는 일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문학작품의 번역은 언어작업 뿐만 아니라 문화에 대한 기본적인 작업도 필요로 합니다. 무엇보다도 외국어와 출발텍스트의 언어에 안주하지 말고 문학텍스트가 담고 있는 낯선 문화와 그 텍스트가 속해 있고 수용되는 고유한 문화 속에서 문학작품의 번역이 수행되어야 합니다. 이 두 문화 사이에, 경우에 따라서는 여러 문화 사이에 존재하는 틈새에서, 즉 간문화성의 협상공간에서 문학작품의 번역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문학작품과 문화의 번역이 만난다는 것은 이미 번역학의 역사에서 항상 논란의 소지가 있고 많이 논의되었던 주제였으나, 문화연구가 출현하고부터 이 주제는 이론적으로 새롭게 조명받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저는 첫 번째 부분에서 문화 번역가로서 문학 번역가가 갖는 기능과 과제들, 다양한 역할들, 작업하는 동안 번역가가 쓰는 속임수까지도 비교적 상세하게 정의하고 성찰해 보고자 합니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문학 번역가의 실제작업을 조망하게 해주는 경험들을 언급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선별해낸 문학작품들을 중심으로 한국어를 독일어로 번역할 때 발생하는 구체적인 언어적, (간)문화적 그리고 출판상의 어려움과 문제영역들을 다루게 될 것입니다.
다양한 개성의 소유자인 문학번역가
저자이기도 한 문학번역가
번역은 언어 안에서 그리고 언어와 함께 이루어집니다. 번역가는 본래 텍스트를 다른 언어로 옮김으로써 필연적으로 언어와 세상이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 내는 것입니다. 펠릭스 잉골트는 "번역된 텍스트는 계속 쓰여진 텍스트이다"라고 말하면서 번역가란 기본 텍스트를 계속 기술하는 사람임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그렇게 번역가는 저자의 역할을 떠맡게 되고 저자의 계승자로서 작업을 수행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가는 역설적이게도 눈에 띄지 않게 개별적인 저자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덧붙이자면 그가 번역가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번역본을 보고 번역한 흔적을 알아채서는 안 되기 때문이며 의도한 텍스트를 원본처럼 읽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의도한 텍스트가 재창작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는 번역가는 원저자의 대변인으로서 특히 고대와 근세이전의 저자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고대와 근세이전의 저자는 모방할 권리만을 갖는 기교에 능한 수사학자이거나 "현명하고 사려깊은 산파 내지 보조예술가"로서 정의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저자는 최초의 창조자이신 신의 표현하고 기술하는 도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저자는 세상의 일부로서 창조자의 "우주적인" 언어와 세상 안으로 사라졌던 것입니다. 고대 때부터 중요한 권위에 대한 사상은 '저자'라는 개념 속에도 자리하고 있는데, 그러한 사상은 표현하는 주체가 창작 텍스트 뒤로 후퇴하는 현상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모든 것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각인체이면서도 결코 스스로 형식들을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그의 표현들은 막강한 힘이 주도하는 행위에서 생겨납니다. 저자의 표현들은 초자연적인 힘에 빚을 지고 있기 때문에 최초나 근원성과는 거리가 멉니다. 저자의 표현들은 적절한 언어의 발견 내지 고안인 셈이지요. 이 경우 우리는 저자성을 한 개인의 역량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방법론적이고 도구적이며 그래서 번역기술상의 능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저자성을 보증하는 것은 작품과 사건으로서의 텍스트입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번역가, 특히 문학작품의 번역가를 저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번역가는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을 자유자재로 발휘하는 첫 번째 저자를 표현하면서도 눈에 띄지 않게 머물러 있는 매체이며 원본을 살려내는데 도움을 줍니다.
매체로서의 문학번역가
문학번역가는 제 2의 "도구적" 저자로서 연기와 역할전환의 기술을 완벽하게 구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문학번역가는 원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인물들에게 빠져들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이 단지 역할극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기 위해서는 신체적으로나, 성격상으로 그리고 언어적으로 지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인물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문학번역가는 다른 등장인물들을 새로운 언어로 소생시키기 위해 그들을 표현하는 매체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어야 합니다. 배우처럼 보이지 않는 매체이고자 하는 번역가는 인물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인물들은 번역가의 입을 빌어 그리고 번역가의 몸을 빌어 자신의 목소리, 음색, 표현, 감정 그리고 생각들을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번역가는 등장인물(성격)들로 하여금 자신과 관계하도록 허용하고 자신의 소유물을 건드리게 하며 그를 점령하고 파고들게 내버려두는데, 이 등장인물들은 번역가를 무언가에 사로잡힌 사람, 그러니까 황홀경의 매체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는 수시로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이자 변신에 능한 예술가로서 트릭을 쓰는 자이며, 저자의 훌륭한 인물들과 그들의 부활을 매개하는 주술사이기도 합니다.
뱃사공이기도 한 문학번역가
문학번역가는 옮겨 놓는 사람입니다. 그는 무언가를 한 강가에서 다른 강가로 옮겨 주고 그 일에 대한 보상을 받습니다. 설령 그 일이 갖는 위험에 비해 댓가가 불충분하더라도 말입니다. 예를 들어 사공(번역가)이 자신의 목적지를 올바른 코스에서 조종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고, 폭풍우로 인해 낯선 언어의 급류와 자기 언어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암초나 땅에 부딪혀 전복하고 침몰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출발점과 목적지사이에 놓인 운하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이어서 홍수로 범람할 수 있고 사공을 엄습해 익사시킬 수도 있습니다. 혹은 그 흐름이 정체되어 건너는 일을 아예 포기해야 할 정도로 운하가 아주 얕을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상황에서 뱃사공은 말문이 막혀 버립니다. 그가 훌륭한 뱃사공이나 조타수라면 건너고 있는 운하의 함정들을 알고 그것들 사이를 뚫고 확실하게 항해할 것입니다.
뱃사공이라 할 수 있는 번역가는 항상 헤르메스(상업, 웅변, 과학 따위의 신)이면서 카론(명부의 스틱스 Styx강의 나룻배 사공)이기도 한 사람입니다. 카론의 형상을 하고 번역가는 영혼이 계속 살 수 있도록 저 세상 강가로 이끕니다. 그러나 인도되는 것은 죽은 자들의 영혼이지 살아있는 자들의 영혼이 아닙니다. 다시 태어날 수 있기 위해 그들은 자신의 껍데기, 즉 그들의 물질적인 육체를 완전히 벗어 던져야 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번역가가 번역하게 될 텍스트가 말하고 있는 영혼을 다른 강가, 즉 다른 언어의 텍스트 안에서 구제하길 원한다면, 그 영혼은 그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육체, 그것의 물질적 구조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다른 강가에서의 그 텍스트의 삶이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번역가는 저 세상으로의 인도자이면서 헤르메스이기도 합니다. 날개달린 대사이면서 중개상인인 것입니다. 그는 경계의 이편, 저편에서 보내지는 것들을 확실히 인도하고, 교역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도록 애써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혹은 고의로 유출자, 호객꾼, 밀수꾼이 될 수도 있고 스파이와 비밀 첩보원으로 이용당할 수도 있읍니다. 뱃사공은 나라를 넘나드는 경험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도망을 돕는 자이면서 구조자로서 그리고 배반자로서도 활동합니다. 불어에서는 번역(traduction)과 배반(trahision)이 갖는 개념상의 친밀성을 자주 강조하는데, 이는 바로 전위와 탈선의 위험을 풍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 문학작품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일: 스킬라와 카리브디스사이에서
한국 문학작품의 독일어 번역이 갖는 특성은 일반적으로 두 명의 뱃사공이 출발 텍스트를 고스란히 맞은 편 강가로 옮기는 것입니다. 한국의 독문학자들은 짐을 가득 실은 나룻배를 목적지까지 확실하게 저어가기 위해 독일어권 독문학자나 저자들과 함께 작업합니다. 번역가들이 함께 작업하는 이유는 우선 독일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이 위험스럽게도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도 아니고, 이 어려운 항해 자체가 힘을 합쳐야만 가능해서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로지 한국적인 것, 특히 한국 문학을 번역하는 재능 있는 독일 번역가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여기서 확실히 밝혀두고자 합니다. 그러나 독일에서 한국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는 현실은 지금의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는데 틀림없이 일조할 것입니다.
처음에 불리하게 보이는 것이 실제로 반드시 결점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팀웍이기 때문에 처음 번역가와 마무리 작업가로 구성된 팀이 성공적인 번역을 위한 긍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제 2의 전달자'가 - 여기서는 번역가란 표기가 기본적으로 부적절하기 때문에 '제2의 전달자'로 명명하고자 합니다 - 한국어로 된 원 작품을 가지고 곧바로 작업하지 않고 이미 번역된 텍스트 본을 가지고 작업하기 때문에, 그의 머리와 혀는 외국어가 주는 부담감과 번역 작업이 주는 강제성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본래의 언어로 사고하는 공간은 직접적으로 기능하지도 작용하지도 않습니다. 때문에 그러한 사고공간은 언어적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아서 예술적으로도 비교적 자유롭게 나래를 펼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문학적 텍스트의 시학, 문필가의 요구에 도움이 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저는 일을 분담함으로써 텍스트의 영혼을 다른 강가로 건넬 수 있는 기회가 증가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제 2의 전달자는 언어적으로 간섭받지 않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제 2의" 저자의 역할 속으로 빠져들 수 있으며, 직역으로 인한 단절의 결과물들 때문에 괴로워하는 일 없이 계속해서 텍스트를 써 나갈 수 있습니다.
반면에 문학작품을 1차로 번역하는 사람은 언어적인 능력과 더불어 전지적인 능력을 동시에 증명해야 하는 부담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번역이 번역물이 아니라 한 문학작품으로 읽히도록 균형잡힌 문체로 매력 있게 전달해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직역해도 되고 다듬어지지 않은 텍스트를 제시해도 무방합니다. 그가 직역할 경우, 즉 원본텍스트를 언어적으로 보다 고차원적인 상태로 옮겨 놓지 않을 경우, 출발텍스트와 의도한 텍스트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와 편차들을 알고 있는 제 2의 전달자가 원본텍스트를 가능하면 원본에 가깝고 순수하게 자신의 언어로 옮겨 쓸 수 있습니다.
직역하는 최초의 번역가가 단어 그대로, 다시 말해서 의미상으로 그리고 통합적으로 가능하면 정확하게 원본을 고수함으로써 다른 발음체계를 갖는, 사이비 피진언어의 텍스트가 생겨납니다. 그러한 텍스트 안에서는 한국적인 것이 독일적인 것으로 동화되는 것에 저항하고 있음을 여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제 2의 전달자의 과제는 익히지 않은 상태의 텍스트재료를 가공하고 고쳐 써서 새롭게 연결하고 텍스트에 소리와 리듬을 부여하고 필요하다면 그 재료를 삭제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재료를 정교하게 다듬는 작업은 결코 그의 몫이 아닙니다. 이로써 제2의 전달자는 개작자의 과제를 떠맡는다기 보다는 후기생산자의 역할을 넘겨받습니다.
실제 번역작업에서 처음 번역자와 제2의 전달자간의 과제와 기능의 분리는 엄청 유용하고 실용적인 것으로 증명되어 왔습니다. 이는 나의 번역동료인 서울대의 독어독문학과 오순희 교수와 내가 입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한독문학번역연구소의 후한 지원을 받아 한국의 소설가이자 수필가인 이청준의 소설 『소문의 벽』과 『서편제』를 독일어로 번역한 바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후한 지원에 대해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짧게 덧붙이고 싶은 것은 제 2의 번역이 갖는 다른 형태, 즉 제 3의 언어라는 우회로를 거친 언어는 여기서 묘사되었던 것처럼 성공적인 번역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제 2의 번역으로 인해 출발언어 및 문화와의 모든 연관이 제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부분적으로는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독일어 번역물들이 이에 대한 좋은 예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소설『나지마키-도리 쿠로니쿠루』는 - 독일어 제목은 『사람은 태엽감는 새』 - 영문본에서 독일어로 번역된 바 있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번역본이 원본을 얼마나 많이 배반해도 되는지, 혹여 개작에 대해, 무라카미를 자유롭게 개작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한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이어서 제가 한국어로 쓰여진 문학 텍스트들을 독일어로 번역할 때 경험했던 어려움과 난제들을 조명한다면, 앞서 규정한 바 있는 제 2의 전달자로서 그것을 행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는 문학작품의 번역이 논의되고 있기 때문에 문제를 언급한다고 해도 상세한 언어비교 분석을 제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어학자들의 언어능력 영역에 해당하는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한국과 독일의 언어, 사회 그리고 문화의 전형적인 차이에서 생기는 갈등영역만을 가시화할 것입니다.
문화지식의 적용
한국문화는 서방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불가사의한 문화입니다. 한국문화가 양산했던 문학은 한국문화와 역사에 대한 엄청난 배경지식을 전제로 하는데, 독일을 포함한 서방의 독자는 그러한 배경지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한국문학을 독일어로 전달하는 일은 그러한 관점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작업이 한국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소수의 문학으로 머물게 될 것입니다. 이는 번역작업이 항상 문화적인 매개작업도 포괄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문화를 매개하는 작업이 어떤 모양새를 하고 있는지는 개별적인 사례를 통해서만 답할 수 있겠습니다.
보충지식인 배경지식을 번역 안으로 삽입하는 방법으로는 여러 가지가있는데, 주석, 텍스트내의 설명삽입 혹은 주해의 형태로 배경지식을 보충해 넣을 수 있겠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설명이나 주해들이 가능하면 눈에 띄지 않게 처리되어 독서흐름, 문장멜로디 그리고 사건진행을 방해하거나 중단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경험한 것 가운데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그러한 예들이 독일 독자에게는 설명을 요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관점에서 진부해 보이는 예들이 독일 독자의 시각에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경우들이 있다는 얘깁니다.
식사와 음주문화로 얘기를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먹고 마시는 일은 살 맛 나고 흥겨운 사회생활에 대한 이념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한국인에게 있어서는 엄청 중요한 부분입니다. 김치는 이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밥, 불고기 그리고 비빔밥을 아는 사람도 많습니다. 독일 독자가 냉면, 만두 그리고 매운탕 혹은 막걸리나 소주라는 단어를 보고 아주 구체적인 것을 상상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저자가 해당되는 설명을 함께 제시하고 있다면 그것은 번역가가 운이 좋은 경우입니다. 제가 정혜영씨와 함께 번역했던 조경란의 단편소설 『나의 자줏빛 소파』를 보면 그러한 경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는 "자주 다녔던 노점상은 달걀말이김밥을 주메뉴로 내놓는 곳이었습니다. 왜 기차역이나 공원 입구에서 아주머니들이 파는 조그마한 미니 김밥 있잖아요. 달구어진 팬에 달걀물을 풀고 그 김밥을 다시 둘둘 마는 거예요."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저자가 설명을 해주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번역가는 그러한 설명을 텍스트 안으로 삽입하거나 각주 내지 주석을 달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저는 번역가가 한국의 고유명사의 사용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독일 독자에게서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을 기대할 수 있고 또 기대해야 할 것이며 낯선 것의 이름을 명명하고 외국어로 그것을 표기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 또한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의 고유명사들을 독일어안으로 수용하는 것은 전지구화된 세계에서 점차 의미를 얻고 있는 (간)문화적인 능력을 계속해서 증진시켜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합니다. 일본의 정종을 의미하는 자케(Sake)는 독일어에서 확고하게 자리 잡은 개념입니다. 왜 소주와 막걸리가 장차 독일어 단어집에 포함되어서는 안 된단 말입니까? "쌀맥주(Reisbier)와 같은 신조어로 이어지는 한국 고유명사의 독일어화, 혹은 독일어에서 비교 가능한 상품을 표현하는 개념들을 사용하는 것은 지극히 회의적이며 오해의 소지가 있고 혼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제 소견으로는 이름과 성의 순서를 독일어화하는 것도 목표로 삼고 있는 언어의 문화를 잘못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 독일 독자가 '한국어에서는 항상 성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이름을 말한다'는 사실과 대결해서는 안 된단 말입니까? 이름의 의미에 대해서는 워낙 방대한 부분이라 따로 언급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 테마가 사안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청준의 중편소설 『소문의 벽』에서 주인공 박준은 자기 이름의 두 번째 음절 "일"을 의식적으로 생략함으로써 정체성놀이를 합니다. 한국어에서 고유명사만큼이나 어려운 문제가 친척관계의 표기와 공손한 표현입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유사한 표현들이 독일어에 없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우리는 그것들을 독일어로 전달할 수 없습니다. 물론 독일에도 나이가 위인 자매와 나이가 아래인 형제가 있지만, 아무도 나이가 위인 그의 혹은 그녀의 형제를 "형"이란 호칭으로 부른다는 생각은 못할 것입니다. 번역가가 "언니"나 "주(도)자"같은 친척(종족)관계를 나타내는 한국어 표기를 독일어화한다면, 구태의연한 문체 혹은 인디언이 교제할 때의 어투를 상상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정중함을 표현하는 후철 "양"에도 적용됩니다. 왜냐하면 나이를 먹은 얌전한 아가씨는 여성해방의 의미에서 현대 독일어단어집에서 그 사이 제거되었기 때문입니다.
번역가가 시대에 맞지 않고 독일 독자에게 불쾌감을 안겨주는 경우들을 피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앞서 제안한 것처럼, 한국식 표기들을 받아들여서 그 표기들을 주해에서 설명하는 방법이 있고 - 아니면 개념의 독일어화는 아니지만 상황과 관련이 있는 독일식의 호칭이나 정중한 표현으로 볼 수 있을 독일식 표현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한국어 표기의 톡성들과 함께 훨씬 더 폭넓은 한국의 문화, 사회 그리고 역사의 특징들은 번역가와 출판인을 통한 매개를 필요로 합니다.
예를 들어 이청준의 소설 『서편제』는 기본적으로 판소리라는 음악장르, 그것의 역사 그리고 노래들을 잘 아는 사람만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판소리가 자아내는 정서와 분위기를 살리는 일은 언어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일종의 도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전문개념들과 판소리의 가사를 설명하는 것뿐만 아니라 나아가 - 예를 들어 편집 후기에서 - 짧게라도 역사상 그리고 현재 가장 중요한 판소리의 특징들 그리고 문학에 있어서 판소리가 갖는 의미를 소개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한국문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정치적 입장들을 인식하고 제대로 배열할 수 있기 위해서는 종종 역사지식 또한 결정적으로 필요합니다. 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요컨대 어느 독일 독자가 김광규의 시 「누가 부르는지 자꾸만」에 나타나는 정치적 암시들을 직감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겠읍니까?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제주도 산굼부리 분화구에서 희생되었던 1948년 4월 3일의 민중항쟁이 이 시의 정치적 배경임을 주석에서 밝히지 않았더라면 독일 독자는 이 시를 십중팔구 프로이드식 심층심리학적으로 해석했을 것입니다. 물론 이 방법도 가능한 독서방식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방식은 많은 것을 짚어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 방식은 산굼부리 분화구의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는 정치적 힘을 잘못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매우 불가사의한 영역은 바로 언어문화가 갖는 비유성입니다. 서정시에서는 비유성이 가장 고양되고 심화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시작품의 번역을 가장 어려운 작업으로 보고 있습니다. 언어가 갖는 많은 이미지들은 직역을 허락하지 않고 번역 언어 안에서 새로운 혹은 비교 가능한 언어이미지의 발견을 필요로 합니다. 이청준의 중편소설 『소문의 벽』가운데서 한 예를 고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과음한 한 남자가 "콧구멍에서 잘 익은 감냄새를 물씬거리며"라는 그림같은, 아니 오히려 후각적이라 할 수 있는 이러한 비유는 한국에 대한 지식을 전제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일 것입니다.
한국어와 독일어에서 아주 상이한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동물이나 식물의 상징적 의미는 다루기 힘든 영역입니다. 한국의 문화전통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만 해명할 수 있는 비유들은 전달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서정시를 번역하는 사람(전달자)이 위안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시가 항상 새로운 이미지도 만들어 낸다는 점이고, 시가 상상할 수 없는 것을 표상으로 새롭게 고안한다는 점입니다. 때문에 전달자는 결정할 자유를 갖습니다. 그는 낯선 이미지의 매력을 보존하기 위해 직역을 감행할 수 있고 아니면 부득이하게 저자를 배반하거나 독자를 모욕할 필요 없이 새로운 이미지, 새로운 형태를 과감히 시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언어의 개방성 대 언어의 확정성
맥락(연관관계)을 파악하는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텍스트와 이미지 뿐만 아니라 한국어에 대한 이해도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독일어와 달리 극도로 개방적인 한국어는 집단적으로 전래되어온 무언의 선지식에 기반을 두고 있으면서도 모든 것을 세세하게 언어적으로 제한하지는 않는 언어입니다. 말하자면 맥락(연관관계)에 따라 수용자가 채워야 할 빈자리가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언어를 세부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겠고 그럴 의도도 없습니다. 다만 한국어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자가 거대한, 혹은 미세한 언어적 차원에서 마주칠 수밖에 없는 불확정성과 확정성의 대립을 드러내주는 몇 가지 중요한 언어상의 차이들을 밝혀두고자 합니다. 이러한 차이들은 갈등을 양산할 소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독일어가 속해있는 인도게르만어에서는 명사의 특정한 의미와 불특정한 의미의 대립이 소위 말하는 정관사와 부정관사의 사용을 통해 나타납니다. 반면에 한국어에는 형태상으로 이에 견줄만한 표현수단이 없습니다. 한국어는 관사 없는 언어에 속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지시대명사나 수사가 독일어의 관사가 갖는 기능을 떠맡습니다. 단수와 복수를 구분하는 예도 한국어에서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복수어미마저 사라지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몇 가지 복수부호가 있는 독일어와 달리 한국어에는 다수를 표현하기 위해 "들"이라는 접미어로 만들어지는 단순한 복수형태가 있을 뿐입니다. 게다가 한국어에서는 단수형태(나/그/그녀/그것)를 가지고서 억지로만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개체(개인)로 부릅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자신을 집단의 일원으로 명명한다는 데 있습니다.
반대로 독일어에서는 인칭의 일치가 상당히 중요합니다. 이것은 주어를 항상 명기해야 한다는 점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독일어에서는 주어를 명확히 언급하지 않은 채 문법적으로 옳고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는 문장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반대로 한국어에는 주어생략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것이 가능합니다. 연관관계로 보아 그 문장이 어떤 인물과 관계하는지 분명히 드러날 경우, 주어는 생략가능 합니다. 실제로 언어를 구사하는 데 있어서, 특히 구어체에서는 이러한 경우를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국어를 구사할 때 인칭대명사를 가능한 한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맥락상의 지시 관계를 고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어의 인칭대명사에 해당하는 어휘성분의 자리에 한국어에서는 일반적으로 아무것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다 아는 거라고 전제하는 것을 다시 한번 언급할 필요는 없겠죠. 그러나 만약 누구나 공유하고 있는 기본적인 출발점과 지시 관계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경우, 그리고 알려진 것에 잘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관점들을 덧붙여야 한다면, 알려진 것을 그것의 알려진 형태로 다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독일어의 경우처럼 반복을 피하려고 다양한 대명사(예를 들어 인칭대명사, 지시대명사, 관계대명사, 부정대명사 등)를 통해 대체할 가능성이 한국어에는 없습니다. 이는 한국어로 된 텍스트에서 소급(재귀)형태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그러한 소급(재귀)형태들이 한국어의 지시 관계와 연관성에 꼭 필요한 것이라 하더라도 일일이 독일어로 옮겨 놓을 경우 사족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독일어가 지시 관계의 일치 내지 상관관계, 다시 말해 나란히 배열되어 있는 문장에서 특정한 언어표현들의 동일한 기호속에 있는 반복을 꺼리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번역가는 한국어의 상관관계를 독일어에서 보충형태들을 가지고 가능한 한 대체해야 합니다.
순환성 대 선형성
제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한국어에 내재하는 반복구조는 텍스트의 전체구조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독일 독자는 한국문학에서 소급(재귀)과 반복을 자주 보게 됩니다. 독일어와 한국어를 통역하는 한국의 한 동료여성은 인상적이게도 언젠가 내게 한 명제를 제시한 바 있습니다. 내용인즉슨, 한국의 순수문학작품의 대다수가 연재물의 형태로 인쇄매체와 문학잡지들을 통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많은 작가들에게 있어서 가장 많은 소득원중의 하나인 그러한 모델은 확실하게 재수용하는 구조를 강요합니다. 이 명제가 그럴싸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명제는 유럽과 독일에서도 특히 18, 19세기에 전집출간이전에 모든 소설을 연재물의 형태로 인쇄했었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습니다. 또한 그러한 출판형태에도 불구하고 전 소설이 내부적 소급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내•외적인 진전, 사건의 선형적인 전개방식에 의해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고 있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한국어에는 독일어의 선형적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듯한 필치와 반대되는, 순환적인 언어, 진술 그리고 사고의 움직임이 있습니다. 물론 반복이라고 하는 것은 의식적으로 사용한 문체수단일 수 있습니다.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작품에 나타나는 반복적이면서 리듬을 살리고, 자기순환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구조들을 한 번 보십시오. 그런데 그러한 반복들은 눈에 띄어 알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급(재귀)은 저자(와 번역가)로 하여금 고약한 문체로 저술했다거나 표현력의 부족으로 허덕이고 있다는 비난을 받게 만듭니다. 물론 번역가가 어디서 반복이 불필요하게 사용되었고 혹은 적절히 이행되었는지 결정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게다가 그러한 결정은 섬세한 언어감각과 문학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필요로 합니다.
문체상으로, 리듬상으로 혹은 내용상으로 별 의미없이 '반복'이 나타나고 있다면 그러한 반복은 삭제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독자가 지루해 할 위험이 있습니다. 번역위원회는 왠만해서는 많은 변화를 주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스럽고 그래서 지울 수 없는 단어들이 사용된 원 텍스트의 일부분을 소홀히 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손실이라는 것은 다른 측면에서 보면 소득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번역에 도움이 되는 한, 원본에 약간 손을 대는 것은 용인할 만한 일일 것입니다! 독일어로 된 번역텍스트는 삭제 내지 축약으로 인해 엄청난 이득을 취할 수 있지만, 그러한 소득은 본래 텍스트의 가치와 문필가의 명성을 훼손시킬 수도 있습니다.
간접성 대 직접성
문학작품을 번역하는 사람은 한국어의 순환적인 사고가 독일어의 곧은 성질과 합일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불일치는 직접성과 간접성사이의 차이도 항상 포함하고 있습니다. 파리에서 강의하고 있는 영향력 있는 중문학자이자 철학자인 프랑스와 줄리앙은 언젠가 중국 문학의 특징을 "간접성의 이데올로기"로 규정한 바 있습니다. 중국 시인이자 문학가인 그는 우회술에 정통하고 암시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전달하며 미사여구를 써서 완곡하게 말한다고 합니다. 쥴리앙은 중국문학의 암시적 성격을 강조합니다. 그에 따르면 중국문학은 이해하도록 만들지만 말하는 것을 피하며, 함축적이어서 독자로 하여금 행간읽기를 요구하는 문학입니다. 저는 한국문학도 중국문학의 경우와 유사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한국문학은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그것의 주변을 맴돕니다. 한국문학은 우회로를 고려하고 관망과 반복을 행하며 신중하게 전진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거리를 취합니다. 때문에 한국문학은 독백의 성격이 강합니다. 이러한 간접성의 원인이 어디에 있으며, 우리가 함축적이고 암시적인 접근방식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를 토론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한 성향의 이면에는 세계가 재현의 대상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모사할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을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간접성을 그냥 지나칠 방법은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번역가는 다시금 골머리를 앓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독일어가 표현과 기술상의 직접성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직접성은 간접성을 재현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결국 여기서 우리는 언어의 충돌뿐만 아니라, 문화의 충돌과도 관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청준의 중편소설 『소문의 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일은 큰 모험인 셈입니다. 독일어 텍스트는 화자의 내적 독백, 그의 의미심장한 암시들로 가득합니다. 예감과 추측을 표현하는 접속법의 사용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고, 이제는 수사학적으로 제기된 물음들에 답한다든가 혹은 혼잣말을 구현하기 위해 부분적으로만 사용되고 있는 간접화법이 지배적입니다. 간접화법은 자주 문장의 처음에 인용부호 자리에 말바꿈표(줄표)로 표기됩니다. 직접적인 대화는 내적 성찰로 인해 영구적으로 중단됩니다. 독일 독자라면 이러한 암시적인 간접성에 곤혹스러울 것입니다. 설령 그가 내적 독백과 직접화법 같은 서방의 현대적인 문학형식들에 잘 훈련되어 있다 하더라도 너무 지나치게 암시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오리무중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암시와의 유희에 끼어들어 그러한 유희가 갖는 매력을 차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번역가가 독자를 그렇게 하도록 만들 수 있다면 자신의 몫을 해 낸 것이 되고 문학번역과 문화번역의 중심이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저는 문학작품의 번역이라는 주제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청중여러분들도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를 안전하게 가로질러 이끌었기를 바랍니다. 저의 원고를 번역해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 선생님들이 저를 배반했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그랬다면 저는 여러분들에게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청중인 여러분이 저를 이해하셨으리라 확신하기 때문이며, 반대로 강연을 하고 있는 제가 마주하고 있는 청중석과 통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번역 : 이숙경)
2004년 서울국제도서전 심포지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