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최초의 여류비행사 박경원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겪어야 하기엔 너무나도 어이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국권을 빼앗긴 식민국가의 국민으로서 겪어야 했던 멸시와 천대, 모멸감에 버금갔을지도 모른다. 비록 조국의 하늘조차 빼앗긴 현실이었지만, 하늘을 날고자 했던 그녀의 간절한 꿈이 없었다면 인내하기 불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죽음을앞둔 상황에서 그녀는 비행을 가로막은 세찬 비바람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6남매중 막내딸, 그녀가 열여섯살이 되던 해 혈혈단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이유는 오직 하나, 하늘을 날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돈을 마련하지 못해 잠시 귀국했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 3년간 조산원, 간호사로 일하며 돈을 모아 또다시 일본으로 향했다. 1925년 마침내 그녀는 다치가와 비행학교에 입학함으로써 꿈을 이루기 위한 첫발을 내디뎠따. 서른세명의 학생 중 여성은 여섯명. 그리고 그녀가 유일한 조선인이었다. 꿈이 간절했던 만큼 그는 각고의 노력을 했다. 여자는 엉덩이가 커서 비행기 조종은 무리라는 성차별의 조롱도 참아냈고, 비싼 기름값을 마련하기 위해 간호사로, 택시기사로 밤낮없이 일한것도 남학생들과 겨뤄 절대 뒤지지 않는 실력을 갖추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1928년 7월 30일, 그녀는 마침내 고등비행사 자격증을 땄다. 비행레이스에서 여성 입상자는 늘 그녀 혼자뿐이었다. 당시 조선인 여성으로서 비행대회에 출전하는 것은 기회조차 극히 제한되었지만, 그녀의 의지를 꺾을수는 없었다. 남자와 겨뤄 결코 뒤지지 않는 그녀를 보고 비행학교는 학교의 꽃이자 머리좋은 미인으로 칭찬했지만, 수석졸업을 한 그녀를 시기해 졸업장까지 찢는 남학생들의 횡포는 그칠 줄 몰랐다.
1930년, 열두명이었던 일본의 비행사 중 직접 비행을 하는 여류비행사는 그녀가 유일했다. 비행사의 꿈을 품은 지 13년, 비행학교에 들어간 지 9년만에 그녀는 오랜 숙원인 고국 비행을 하게 되었다. 1933년 8월 7일 오전 10시 34분, 그는 자신의 애기愛己인 청연靑燕을 타고 고국하늘을 향했다. 그러나 비행 50분만인 11시 25분, 아타미 상공을 가로지르던 청연은 폭풍우에 의해 하코네 산에 추락함으로써 인력으로 막지 못했던 그녀의 드라마 같은 서른세살의 삶은 마감되었다.
사람들은 비행긔를 터져서 죽는 두려운 물건으로 생각하오. 그러나 나는 긔여히 비행가로서 성공을 하야 남자에게 지지 않는 활동을 하겟소(1925년 7월 5일자 동아일보 인터뷰중에서)
- 최승영, 도베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