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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학년얘기 - 순이와 달팽이

알 수 없는 사용자 2004. 9. 12. 11:56
[선생님이 들려주는 이야기/저학년] 발행월 : 96년 10월

순이와 달팽이


김제곤 / 인천 삼산초등학교


순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늦은 점심을 먹고 있을 때였다.

“탕, 탕, 탕탕탕.ꡓ

부엌문을 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ꡒ순이 할머니 방에 있어요?ꡓ

하는 주인 아주머니의 말소리가 들린다. 할머니는 못 들은 체 앉아 아침부터 시작한 꽃술을 달고 있다. 순이가 숟갈을 든 채 대신 일어나 방문을 연다.

입가에 심술이 덕지덕지한 주인 아주머니는

“허구한날 그놈의 꽃만 만들면 뭘해요? 어디 그게 돈이 된답디까? 차라리 파출부라도 나설 일이지.ꡓ

쯧쯧 혀를 찬다.

ꡒ내 방세라도 보탤 참이네.ꡓ

ꡒ이제 방세 필요없수. 요번 달 내로 이 방 빼요.ꡓ

꽃술을 달던 할머니 손이 슬그머니 멈추었다.

ꡒ방을 빼라니?ꡓ

ꡒ우리 이 집 헐구 새집 지을려고 한답니다. 한 3층 올릴건데, 여기 방을 빼야 우리두 공사를 헐 게 아니겄수.ꡓ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을 한 아주머니는 순이 얼굴과 밥상을 마뜩찮은 낯으로 훑어보곤 휭하니 나간다.

방값이 많이 올랐다는 것쯤은 순이도 안다. 여기서 나가면 우리 식구는 어디로 갈까. 순이는 시험을 볼 때처럼 자꾸만 가슴이 답답했다. 이것을 아는가 모르는가 불쌍한 아버지는, 몸이 성치 못한 아버지는 오늘도 어디선가 술만 잔뜩 먹고 올 것이다.

남들은 저녁을 먹고 오순도순 재미난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을 무렵이다. 아버지는 정말 잔뜩 술에 취해 오셨다. 술만 취한 것이 아니라 고래고래 소리까지 지른다.

ꡒ그깟놈의 것 저리 안치울거유? 썩 안치울거야?ꡓ

할머니가 만들어 놓은 꽃을 이리저리 흩뿌린다.

할머니는 말없이 흩어진 그것들을 하나씩 주워 모은다.

ꡒ치우라는 데 이 늙은이가…….ꡓ

할머니는 그래도 두말없이 꽃을 담고 있다.

ꡒ에이, 이놈의 집구석 불이나 그냥 싹 싸질러 버릴까 보다.ꡓ

그때 할머니가 아버지 멱살을 잡고 늘어졌다. 사고로 잃은 아버지의 팔 한 쪽이 덜렁거린다.

ꡒ그래 이눔, 쫓겨나 한데서 얼어죽나 네놈 손에 불에 타죽나 그게 다 한 가지다. 질러라 이눔. 불을 질러 이눔.ꡓ

할머니는 실성한 사람처럼 아버지 멱살을 잡고 그렇게 울부짖는다. 순이는 어쩔줄 몰라하다가 저도 모르게 집 밖으로 뛰어 나왔다. 뛰어 나와 보니 늘 답답한 골목 안이다. 자꾸만 어디론가 오르고 싶다. 찬 바람이 쐬고 싶다.

순이는 한참을 걸어 컴컴한 산길까지 왔다. 계단이 있지만 더 올라갈 용기는 생기지 않는다. 계단 아무 데쯤 펄썩 쭈그리고 앉았다.

순이가 멍하니 계단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으려니 풀밭에서 나온 달팽이 하나가 계단위로 가만가만 기어 오른다. 순이는 저도 모르게 달팽이를 보고

ꡒ달팽이야 너는 좋겠다.

너는 태어날 때부터 집도 있고 달팽이야 너는 좋겠다.ꡓ

가만히 노래를 부른다.

추석이 가까워서인지 순이 머리 위로 달이 제법 둥글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