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없는 사용자
2004. 5. 31. 19:22
국립현대미술관은 2004년 6월 2일부터 덕수궁미술관에서 <2004 올해의 작가 : 정점식>전을 개최한다고 한다. 소개에 따르면,
극재(克哉) 정점식은 1917년 경상북도 성주에서 출생하여 1950년대 이래 현재까지 대구에서 활동하면서 대구화단의 발전과 미술교육에 지대한 역할을 담당해온 작가이다. '극재' 곧 '이겨낼 수 있을까?' 라는 독특한 호를 가진 작가는 1930년대의 대구화단 선배들(김용조,서진달, 박재봉)을 통해 처음 유화를 접했으나 이들의 유산을 뛰어넘으려 애썼으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이 아닌 세계의 본질에 근접한 예술형식을 추구해왔다.이번 전시는 1940년대 하얼빈 체류기의 드로잉에서부터 2004년 근작에 이르는 작가의 전 시기의 작품 60여점과 책 장정본, 팜플렛 디자인 등의 관련자료 20여점이 선보인다. 전시는 8월 8일까지 계속된다.
'세계의 본질에 근접한 예술형식'이니 하는 현란한 수식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싶어 그의 작품을 찾아보았다. 그의 작품은 정점식 또는 Kukjae.org (극재 정점식 홈페이지)에서 감상할 수 있다.
솔직히 그의 그림은 그닥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글 하나가, 쿵, 가슴 속으로 떨어졌다. 수적(手跡)이란 제목의 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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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여름 대구에서 기이한 그림 한장을 발견했다.그것은 속칭 뺑기 그림이라고 불리워지는 상업적인 것이었지만 기술적으로 그것에는 미치지 못한 서툰 그림이었다. 이것을 발견한 장소는 신문사를 가까이 끼고있는 다방이며 그날 나는 기자 한사람을 만나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앉아서 본 맞은편 벽면에 이 그림이 걸려 있었다. 처음 나는 이것을 그냥 봐 넘기려 했지만 그것이 심상치 않은 표정을 내게 다가온 것이다. 8호나 10호 크기의 이 그림은 원경 지평선을 따라 너그러운 능선이 평풍처럼 지르고 중경 왼쪽 화면에는 복사꽃이 핀 몇 그루 나무사이로 낡은 초가집 한채가 보이고 있다. 아래쪽 건경에는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 남편에게 점심밥을 날라다 준 아내롸 업고 온 어린 아이가 있다. 이들이 앉아있는 자세는 점심밥을 먹고 난 바구니 속의 그릇이나 물병을 중심으로 맞은편에 검은 통치마와 젖가슴이 반쯤 노출된 짧은 흰 저고리를 입은 아내가 앉아 있다. 화면에서 등을 보이고 있는 남편은 아이의 양 겨드랑이에 두손을 끼고 하늘높이 치켜 올리고 있다. 그 밖의 공간은 파릇파릇한 보라싹이 드문 드문 깔린 들판이며 멀리 보이는 능선은 나무 한그루 보이지 않는 군데군데 황토색 피부를 드러낸 불모이며 정체적인 화면 분위기는 갈색조의 메마른 풍경이다. 아이를 하늘높이 치켜 올리고 있는 정겨운 광경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표정은 입 양언저리가 위를 올라간 소위 아르카익 스마일(Archaic Smile)이며 웃고 있는 그 얼굴에서 오히려 고통스러움을 느낀다. 이 애환(哀歡)에 얽힌 읽기 어려운 서글푼 미소는 서민들 특유의 그것이다. |  Sketch |
이 그림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상업적인 것이지만 기술적으로 그것에는 미치지 못하고 그 스스로가 익힌 서툰 솜씨고 주제를 다루느라고 안간힘을 다한 흔적이 이사람 특유의 수적(Manner)으로 수놓여지고 있다. 배경의 풍경이나 인물들의 옷자락 또는 얼굴의 굴곡마저도 빛의 방향에 따르는 음영이 난조를 이룰 때도 있지만 오히려 이들 효과가 화면의 조직성을 떠받치고 있다. 이 애절한 집념으로 엮어낸 앙티미즘(Imtimisme), 나는 그것을 무심코 봐 넘길 수가 없었으며 우리들의 현실과 관련된 가슴에 닫는 절심함이 있었다. 기다리던 기자를 만나서 요담을 마침후 저 서툰 그림에 대한 감동을 이야기 하고 돌아왔다. 며칠 후 그 기자와 같은 다방에서 만나서 이야기 하던 중 저 그림에 관한 화제로 옮겨지면서 들은 이야기로는 그것이 교도소에 수감중인 죄수가 그림 그림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 들었다. 나는 교도소 바자회에서 구입했다는 이 그림을 다시 확인하려 했으나 이미 그 자리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으며 유명화가로부터 좋은 그림이라는 지적을 받은 이 다방 여주인은 그것을 소중히 간직하기 위하여 집으로 가져갔다는 것이다. 나난 앞에서 이 그림을 상업적인 수법을 쓰고는 있지만 그것에는 미치지 못한 서툰 것이라는 말을 했지만 이미치지 못한 기술이 오히려 그가 담고자 하는 애절한 사연을 묻어나오게 한것이다. 만일 그것이 직업적인 능숙한 솜씨로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그 진실은 기술적인 형식속에 숨어버렸을 것이다. 이서툴다는 사실에 대한 자책(自責)은 그로 하여금 더욱 열과 성을 다한 밀도로 엮어내려 했으며 이 인간적인 성실성은 예술창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며 그것은 또한 저 죄수의 그림과 같은 민중적인 예술의 한특질이기도 하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이르는 시기는 미술계가 추상표현주의적인 앙포르멜(Informel)이나 기하학적인 싸늘한 형식에 휘말리면서 그것이 국제적으로 유형화(類型化)되어가는 무렵이였으며 이런 상황 밑에서 볼대 저 죄수의 그림에서 보여준 리얼리티는 참신한 충격이 아닐 수가 었었다. 6.25의 상처가 이르는 곳 마다 노출된 각박한 현실을 잊고 작가들은 저마다의 국제적인 추세에 끌려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회의와 반성같은 것을 통감한 것이며 저 죄수의 그림에서 그것을 다시한번 확인한 것이다. 피카소가 신고전주의(Neoclassic)의 시기에 남긴 [낮잠]이라는 그림이 있다. 지평선으로 광활하게 뻗은 농장을 배경으로 곡초더미의 그늘에 두 남녀가 낮잠을 자고 있는 정경이다. 마치 콜호즈와 같은 농장에 누워있는 남녀는 농부의 부부이며 점심밥을 먹은 후 휴식을 취하고 있는 장면이다. 이 그림은 저 죄수가 그린 그림과 같은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대조적이며 이들의 장미빛 피부의 풍만한 육체에 비해서 형용해도 좋지만 그러나 피카소의 그것보다는 죄수의 그림이 동기에 있어서 한층 절실함을 보여주고 있다. 1961년 출간된 브라사이(Brassai)의 사진집(Grafigch)은 정치범 사형수들을 수감랬던 바스티유감옥 옥사에 지수들이 새긴 낙서(落書)를 소재로 찍은 작품집이다. 죽음을 앞둔 불안과 공포, 광기와 노여움이 경련을 일으킨 손톱자국으로 얼룩진 이들 벽면은 인간의 마지막 심장의 고동과 그 심적 움직임의 희귀한 기록이며 인간이 다같이 누릴 수 있는 평등과 자유를 말살하려는 집단에 대한 분노와 저주와 항의와 같은 몸부림의 흔적이다. 브라사이는 이기록으로 하여금 피카소를 열광시키고 피카소와의 대화집[Conversation-Picasso]을 엮는 계기를 만들었다. 나는 저 애절한 향수를 그린 죄수에 대해서 죄명도 형량도 아는 바가 없고 바스티유 감옥의 길로틴과 관련시키고 싶지는 않지만 가족들과 더불어 그 귀추가 궁금한 것이다. 한사람이 남긴 수적에서 이처럼 현실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또는 오늘날의 예술이 지나친 전문적인 수직성에 매달린 나머지 흘리기 쉬운 사회적 사상(事象)에 대해서 크게 느낀 바가 있는 것이다. |